해방정국 3년 (10)
임정 귀국 후의 남한 정국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구 · 김원봉 등 임정 요인이 귀국한 후의 남한 정국은 4개당이 메이저 리그를 형성하였다. 즉 중도 좌익인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중도 우익의 국민당, 그리고 좌익인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우익인 송진우의 한민당이었다.
그런데 임정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과는 거리를 두었고, 한민당에겐 우호적이었다.
9월 11일에 재건된 조선공산당 총비서로 선임된 박헌영은 9월 20일 중앙위원회에서 8월 테제가 채택됨으로써 공산당의 조직과 노선을 장악했다. 공산당의 성세는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결성으로 크게 떨쳤다. 전평은 공산당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전국조직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임정 귀국 전에 ‘임정추대’에 반대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임정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살아온 것은 노동자 · 농민 · 대중이고,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12월 13일에 조선공산당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 좌우에서 각각 절반씩 참여하는 통일방안을 제시했지만, 임정은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12월 5일에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도 결별을 선언하고 이승만과 완전히 갈라졌다. 이승만은 12월 17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방송을 통해 공산분자들은 ‘국경을 없이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먹고, 소련을 자기들의 조국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매국’노라고 규정한 후,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는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각국에 선언한다’고 말했다.
또한 임정은 중도좌파인 여운형의 방문마저 거절하였다. 여운형은 11월 12일에 인공의 좌경화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조선인민당을 발족했는데, 그는 임정추대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임정은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등 좌익에 대하여는 단호한 태도를 취한 반면, 친일 협력자에 대하여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임정 요인들이 머문 경교장이 친일 자본가 최창학 소유이듯이,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을 맡았다. 김구 역시 해방 후의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 친일파와 어느 정도 손을 잡은 것이다.
9월 16일에 송진우·김성수 등 우파계열은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임시정부 봉대론’을 주장하였다. 한민당은 임정 귀국전인 10월 20일에 ‘환국지사 영접위원회’라는 외곽 단체를 조직하여 임정 요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석총무 송진우가 주도한 ‘환국지사 영접위원회’의 모금 활동에 대하여 위기봉은 저서 『다시 쓰는 동아일보사(1991년)』에서 이렇게 적었다.
“송진우는 재계 20여 명의 적극적인 옹호로 단시일 동안에 2천여 만원(쌀 2만 6천석에 해당)의 거금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한민당 수뇌부는 12월 초에 임시정부 요인들을 방문하여 귀국 인사를 하면서 900만 원의 정치자금을 김구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김구는 임정 재무부장 조완구(12월 3일에 2진으로 귀국)와 상의 끝에 이 돈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되돌려 주기로 결정했다.
조완구는 송진우를 찾아가 돈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부정(不淨)한 돈을 받을 수 없소. 이것은 우리 임시정부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다음 날 동아일보 사옥 2층 ‘환국지사 영접위원회’ 사무실에서 임정과 한민당 실무자들이 만났다. 여기서 임정 인사의 친일파 운운하는 발언이 발단이 되어 한민당의 장덕수와 언쟁이 붙었다.
위기봉은 저서 『다시 쓰는 동아일보사(1991년)』에서 이렇게 적었다.
“옥신각신하다가 장덕수가 따귀를 얻어맞는 소동이 벌어져 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송진우가 나서서 김구에게 뷰익 승용차 한 대를 진상하고, ‘임시정부도 정부요, 정부가 받는 세금 가운데는 양민의 돈도 들어 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 있는 법이요’ 운운하면서 설득한 결과 임시정부는 이 돈을 받아들였고, 중추원 칙임참의에 만주국 총영사를 지낸 거물급 친일파 김연수는 12월 16일에 경방 이사 최창학과 함께 김구를 찾아가서 이와는 별도로 700만 원을 헌납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해서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으나 제 것 주고 뺨 맞은 한민당 수뇌들의 입맛은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p 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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