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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순례자의 노래 (8)- 문종, 단종을 염려하다.

순례자의 노래 (8)

- 문종, 단종을 염려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41(세종 23) 724일에 세자빈 권씨가 산후통으로 별세했다.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을 낳은 지 하루 만이었다.

 

세자빈 권씨가 별세한 지 4개월 후인 윤 1118일에 세자빈의 부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권전(權專)이 죽었다. 이 날의 세종실록이다.

 

죽음에 미쳐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이틀간 철조(輟朝)하고 관청에서 장사를 도왔다. 시호(諡號)는 경혜(景惠)라고 내렸는데, ()로 말미암아 구제하는 것은 경()이고, 백성을 사랑하여 주기를 좋아함은 혜()이다. 아들은 권자신(權自愼)이다.”(세종실록 1441년 윤11184번째 기사)

 

이로부터 9년이 지난 1450217일에 세종대왕(13971450, 재위 1418-1450)이 막내아들인 8남 영응대군(永膺大君)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훙()하였다. 재위 기간은 316개월이었다.

 

219일에 황보인·남지··정인지·허후·이사철 등이 문종(14141452, 재위 1450-1452)의 종기를 염려하여 동궁에 물러가 조섭하기를 청했다. (문종실록 14502192번째 기사)

 

문종은 1421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144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섭정을 하였다. 그는 30년간 왕세자로 있으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준비된 임금이었다. 그런데 몸이 허약했다.

 

145078일에 문종은 현덕빈(顯德嬪) 권씨를 추숭(追崇)하여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삼았다. 문종은 왕위에 오른 후 따로 왕비를 두지 않고 세자빈 권씨를 왕비로 추존한 것이다.

그런데 1452514일에 문종이 강녕전(康寧殿)에서 재위 23개월만에 훙()했다. 춘추(春秋) 38세이셨다.

 

145291일에 문종은 현릉(顯陵)에 장사(葬事)하였다. 현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안에 있는 능이다.

 

한편 문종의 묘지문[墓誌文]에는 현덕왕후에 대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현덕왕후 권씨는 증() 의정부 좌의정권전의 따님입니다. 정숙(貞淑)한 덕과 온순(溫順)한 용모가 있어 간선(揀選)되어 동궁에 들어와서 승휘(承徽)가 되었다가 후일에 승진되어 빈()이 되었는데, 왕보다 11년 먼저 훙서(薨逝)하니, 시호(諡號)를 현덕(顯德)이라 하고 경기도 안산군(安山郡)의 소릉(昭陵)에 안장(安葬)하였습니다. 후에 왕께서 즉위(卽位)하시니 왕후(王后)로 추책(追冊)했습니다.

1(), 1()가 탄생했으니, 아들은 곧 우리 전하(殿下 단종)이시고, 딸은 경혜 공주(敬惠公主)로 책봉되어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에게 하가(下嫁)했습니다.” (문종실록 1452913번째 기사)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문종은 집현전 학사들과 김종서·황보인에게 세자(단종)를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다.’고 적혀있다.

 

문종은 병환이 심하자, 집현전의 여러 신하를 불러 촛불을 켜고 서로 문제를 토론하다가 밤중이 되자, 무릎에 단종을 앉히고 손으로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고 술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편히 앉아서 먼저 술잔을 들어 권하니, 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이 모두 술에 취하여 임금 앞에서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임금은 내시에게 명하여 방문 위의 인방 나무를 뜯어다가 들것을 만들어 차례로 메고 나가 입직청(入直廳)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그날 밤에 많은 눈이 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신하들이 술이 깨니,좋은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고, 온 몸에는 담비털 갖옷이 덮혀 있었다. 임금께서 손수 덮어준 것이다. 서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특별한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세조에게 달라붙어 단종을 배신한) 신숙주의 거취는 그 모양이 되고 말았다. 축수록(逐睡錄)

 

문종이 승하할 때 세자는 어리고 종실(宗室)은 강성한 것을 염려하여 황보인(皇甫仁김종서에게 특히 명하여,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임금을 보필하라.” 하였다. 야언별집(野言別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