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6)
-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0년 9월에 김시습과 남효온·김일손은 북한산 중흥사에서 5일간 함께 지냈다. 이들은 소릉(昭陵)에 대하여도 이야기하였다.
소릉은 문종(1414~1452 재위:1450~1452)의 세 번째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의 능이다.
문종은 아내 복이 없는 임금이었다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는 세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민간에서 떠도는 망측한 비방을 쓰다가 발각되어 1429년 7월 20일에 폐출되었다. 김씨가 폐출된 3개월 후인 10월 15일에 세종은 순빈 봉씨를 두 번째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그런데 봉씨는 용모는 아름다웠으나 성격이 드센 ‘엽기적인 그녀’였다. ‘세종실록’에 실린 봉씨의 행각을 살펴보자. (세종실록 1436년 10월 26일, 11월 7일)
1. 세종이 배우라고 명령한 《열녀전(烈女傳)》을 며칠 만에 뜰에 던졌다.
2. 술을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하기를 좋아했다.
3. 봉씨는 여러 번 투기 때문에 몸소 궁인을 구타하고, 어떤 때는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4 세자가 종학(宗學)에 거처할 때, 봉씨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부터 외간 사람을 엿보았었다.
5 항상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었다.
1430년(세조 12년)에 세종은 왕세자의 후궁 제도를 법제화했다. 세자의 후궁은 정2품 양제, 정3품 양원, 정4품 승휘, 정5품 소훈으로 정해졌고, 권전, 정갑손, 홍심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다. 세자는 권승휘와 홍승휘를 각별히 사랑했다. 그런데 권승휘(단종의 모친)가 임신하자, 봉씨는 거짓 임신 소동을 벌였고, 궁녀와 동성애한 일이 발각되어 세종은 1436년 10월 26일에 세자빈 봉씨를 폐출시켰다.
‘세종실록’을 자세히 읽어보자.
”권승휘가 임신을 하게 되자, 봉씨가 말하기를, ‘태기(胎氣)가 있다.’ 하여 궁중에서 모두 기뻐했는데, 한 달 후에 스스로 말하기를, ‘낙태하였다.’하면서, ‘단단한 물건이 형체를 이루어 나왔는데 지금 이불 속에 있다.’고 하므로, 늙은 궁녀로 하여금 보게 했으나, 이불 속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으니, ‘임신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또한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召雙)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하였다. 어느 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 ’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서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였다.
(...) 이 일들이 자못 떠들썩한 까닭으로, 내가 중궁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 이에 빈을 불러서 이 사실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쌍이 단지와 더불어 항상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에만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것은 곧 저희들의 하는 짓이옵니다.’하였다. 만약 소쌍의 사건만 아니면 내버려 두어도 좋겠지마는, 소쌍의 사건을 듣고 난 후로 내 뜻은 단연코 폐하고자 한다.“
(세종실록 1436년 10월 26일, 11월 7일)
이윽고 세종은 1436년(세종 18년) 12월 28일에 이미 딸(나중의 경혜공주 1436∽1473)을 낳은 후궁 권양원(權良媛 권전의 딸)을 세 번째 세자빈으로 삼았다.
“세종 : 만약 옳다고 한다면 권양원과 홍승휘 중에서 누가 적임자인가. 두 사람은 모두 세자의 우대하는 사람이며 우리 양궁(兩宮)의 돌보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자의 뜻은 홍씨를 낫게 여기는 듯하나, 내 뜻은 권씨를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의정부 : 권씨와 홍씨의 나이의 많고 적은 것과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은 논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그 현덕(賢德)이 한 나라의 국모로서의 모범이 될 만한 것만 볼 뿐입니다. 성상의 결단에 있사오니 신 등이 감히 정할 바는 아닙니다.
세종은 즉시 교지를 의정부에 내려서 양원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세종실록 1436년 12월 28일 1번째 기사)
'김일손의 후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례자의 노래 (9)- 세조, 소릉(昭陵)을 파헤치다. (0) | 2022.01.26 |
---|---|
순례자의 노래 (7)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별세한 현덕빈 권씨 (0) | 2022.01.22 |
순례자의 노래 (5)- 김시습, 공주 동학사에서 초혼제를 지내다. (0) | 2022.01.19 |
순례자의 노래 (4)김시습, 남효온 · 김일손에게 ‘단종애사’를 전해 주다. (0) | 2022.01.17 |
순례자의 노래 (3) 비운의 왕 단종의 죽음 (0) | 2022.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