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영로와 사관 김일손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 탁영로(濯纓路)란 도로가 있다. 길이는 424m에 불과한 짧은 도로이지만, 이 도로는 무오사화의 희생자인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호를 따서 이름 지어졌다.
‘탁영(濯纓)’은 김일손의 호(號)이다. 그러면 ‘탁영’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갓끈을 씻는다.’는 해석만으로는 알 수 없다.
‘탁영’은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屈原 BC 343∼BC 278)이 지은 책 『초사(楚辭)』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굴원은 초나라 회왕을 도와 정치 활동을 했으나,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로 추방당했다. 쫓겨난 그는 상수의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한 어부를 만났다. 어부는 굴원에게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자,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가 흐려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하였고,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술에 깨어 있다가 그만 이렇게 추방당한 거라오.’라고 답했다.
어부가 이 말을 듣고, ‘물결 흐르는 대로 살지, 어찌 고고하게 살다가 추방을 당하셨소?’라고 굴원에게 다시 묻자, 굴원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상수(湘水) 물가로 달려가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葬事)를 지낼지언정 어찌 이 어찌 희디흰 순백(純白)으로 세속의 티끌을 뒤집어 쓴단 말이오?’했다.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노로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굴원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해 음력 5월5일에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런데 김일손은 ‘세상이 흐림에도 불구하고 갓끈을 씻겠노라’고 호를 ‘탁영’이라 지었다. ‘滄浪之水濁兮이어도 可以濯吾纓하겠노라’고 다짐 한 것이다. 그러나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혹독했다. 도리어 그는 무오사화로 능치처사 당했던 것이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사화이다. 士禍(사화)는 선비가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사초(史草)로 인하여 일어났고 사관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史禍(사화)라고도 불린다.
무오사화는 25년간 재위하고 1494년에 승하한 성종(1457∼1494)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실록청 당상관인 이극돈(1435∼1503)은 사초를 열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비행이 사관 김일손에 의해 기록된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그가 세조때 불경을 잘 외운 덕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세조 비였던 정희왕후 상(喪)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 등이었다.
이극돈은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김일손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이 실록에 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세조 때의 궁금비사(宮禁秘事 궁궐의 비밀스런 일)를 문제 삼고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팔을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하고, 즉시 세조 때의 훈구공신 노사신·윤필상·한치형을 설득하자 세 사람이 모두 따랐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1일에 유자광은 윤필상,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과 함께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 도승지 신수근을 불러내어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말한 뒤에 이어서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에게 비사(秘事)를 아뢰었다.
처음에 신수근이 도승지가 될 적에 대간과 시종들이 ‘외척(신수근은 연산군의 매제이고 중종의 장인이다)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다.’고 해서 강력히 불가함을 아뢰었으므로, 신수근이 원망을 품고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간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느냐.’하였다.
잠시 뒤 의금부 경력 홍사호와 의금부 도사 신극성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다. 7월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대내로 들려오라”는 전교를 내렸다.
한편 홍사호와 신극성이 달려간 곳은 경상도 함양이었고 체포된 인물은 김일손이었다. 김일손은 1496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청도에 있었는데 상복을 벗자 풍병을 앓아 함양에서 요양 중이었다. 김일손은 홍사호가 나타나자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에서 일어났다면 큰 옥이 일어날 것이오.”라고 말했다.
7월12일에 연산군이 수문당(修文堂 지금의 창덕궁 희정당) 앞문에 납시니,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신수근과 주서 이희순이 입시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을 친국하였다.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조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 대로 말하라."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들었느냐?"
"전해들은 일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 역시 쓴 것입니다. 그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실록》은 마땅히 직필(直筆)이라야 하는데, 어찌 망령되게 헛된 사실을 쓴단 말이냐. 들은 곳을 어서 바른 대로 말하라.“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
(중략)
"네가 또 덕종(德宗)의 소훈 윤씨(昭訓尹氏) 사실을 썼다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들었느냐?"
"이것 역시 허반에게서 들었습니다.“
연산군이 가장 먼저 국문한 것은 증조할아버지인 세조의 부도덕이었다. 김일손이 ‘세조가 덕종(1438∼1457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사초에 적었기 때문이다. 이는 세조가 며느리를 탐냈다고 의혹을 살 소지가 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윤소훈은 의경세자의 후실이었다. 그런데 사초에는 “세조는 소훈 윤씨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글이었다.
이어서 연산군이 친국하기를
"전번에 상소하여 소릉(昭陵)을 복구하자고 청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소릉은 문종의 비이자 단종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1418∼1441)의 능이다. 1457년(세조3년) 6월21일에 상왕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6월26일에 세조는 형수인 현덕왕후를 폐서인시키고 소릉을 파헤쳐 관곽을 해변 모래사장에 버렸다.
소릉 복위에 관한 첫 번째 논의는 1478년 4월15일에 생육신 남효온이 처음 제기했다. 이어서 1491년(성종 22)에 김일손은 충청도사로 나갔는데 때 마침 ‘흰 무지개가 달을 관통하는 이변‘이 있어 성종이 구언교를 내리자, 김일손은 소릉복위를 주청하였다.
이후 김일손은 1495년 5월28일 충청도 도사 시절에 병폐 26조를 상소하면서 소릉 복위를 다시 주청하였고, 1496년(연산군 2년) 1월30일에 사헌부 헌납으로 있을 때는 대사간 김극뉵과 사간 이의무, 정언 한훈ㆍ이주 등과 함께 소릉복위를 주청하였다. 1)
연산군은 또 전교하기를,
"네가 또 악가(樂歌)에 대한 일을 썼는데, 어느 곳에서 들었느냐?"
"비록 동요(童謠)라 할지라도 옛사람이 또한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이것까지 아울러 실었습니다. 후전곡(後殿曲)은 슬프고 촉박한 소리온데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여, 가동(街童) 항부(巷婦)라도 또한 모두 노래하였습니다. 신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항상 염려하는 터이온데, 급기야 사가(賜暇)를 받아 독서당(讀書堂)에 있을 적에 성종께서 술과 안주를 내려주셨습니다. 신은 그 여물(餘物)을 가지고 배를 띄워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기에 무풍정(茂豊正) 총(摠)을 불렀더니, 총(摠)이 거문고를 안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연주하므로, 신이 총에게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 곡을 좋아하느냐?’ 하고, 그후 사기(史記)를 찬수할 적에 신이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썼습니다. 확실히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이 되어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창덕궁이 바로 후전(後殿)이고, 후전곡은 단종이 창덕궁에서 거처했던 처지를 구슬프게 노래한 것이다.
이윽고 김일손을 친국한 연산군은 윤필상과 유자광등에게 김일손을 국문하게 하였다. 7월12일에 유자광은 사초(史草)를 가지고 축조(逐條)하여 심문하였다. 김일손이 말하기를, "신의 사초에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신의 생각에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소릉의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에게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수양대군(훗날 세조)은 단종1년(1453년) 10월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하지만 김일손은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절개로써 죽은 인물로 사초에 썼다.
「조의제문」으로 사건이 확대되다.
7월13일에 연산군은 어서(御書)를 내려 김일손에게 묻기를,
"1. 《실록》이라는 말이 무엇을 이른 것이냐? 만약 《실록》이라 한다면 마땅히 사실을 써야 하는데, 너의 사초는 모두가 헛된 것이니, 어떻게 《실록》이라 이르겠느냐?
1. 소릉(昭陵)을 복구하기를 청하고, 난신(亂臣)들을 절개로 죽었다고 쓴 것은 네가 반드시 반심(反心)을 내포한 것이다.” 하였다.
윤필상 등이 어서(御書)를 받들고 국문하니, 김일손은 공초하기를,
"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에게 들었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드디어 종직의 조의제문을 썼습니다." 하였다.
‘노산군이 물에 던져졌는지 불에 던져졌는지 알 수가 없다’는 김일손의 사초는 “송현수 등이 교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자 예(禮)로써 장사지냈다.”는 1457년(세조3년) 10월21일자 「세조실록」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조선 최초의 사화로 번질 일은 아니었다. 유자광이 사건을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일찍이 남이를 모함하여 죽게 한 전력이 있는 모략가 유자광(1439∼1512)은 오히려 옥사를 다스리는 일이 느슨해져 제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하였는데, 하루는 소매 속에서 한 권 책자를 내놓으니, 바로 김종직(1431∼1492)의 문집이었다.
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 ;술주시는 유유(劉裕)가 임금을 죽인 죄를 꾸짖고 도연명(陶淵明)의 충분(忠憤)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를 지적하여 여러 추관(推官)들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악은 모두가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29일자) 2)
7월15일에 유자광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서 연산군에게 아뢰기를, "이 사람이 감히 이러한 부도(不道)한 말을 했다니, 청컨대 법에 의하여 죄를 다스리시옵소서. 이 문집(文集) 및 판본을 다 불태워버리고 간행(刊行)한 사람까지 아울러 죄를 다스리시기를 청하옵니다." 하였다.
그러면 「조의제문」을 읽어보자.
“정축년 (세조3년) 10월 어느 날, 나는 밀양에서 경산(京山)으로 가던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게 되었다. 그 날 밤 꿈에 어떤 신(神)이 일곱가지 문채가 있는 복을 입고 훤칠한 모습으로 나타나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로 이름은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에게 시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는 이내 사라졌다.
나는 잠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방 초나라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거리가 만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 또한 천년이 나 뒤져 있는데, 꿈속에 나와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조짐일까?
또한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은데,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제문을 지어 의제의 혼령을 위로하노라.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을 높일 줄 모르리오. 나는 동이사람이요 또 천 년이나 뒤에 났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중략)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처럼 성내고 이리처럼 탐욕하여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죽였는데도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길러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으니 과연 하늘의 운수가 어긋났구나.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에 닿으니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물려고 한다.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정처 없이 헤매고 있구나.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회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주자의 필법을 따르자니, 불안하고 조심이 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유자광은 은유로 가득 찬 조의제문을 연산군에게 상세히 해석하면서 이글은 김종직이 역심을 품은 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연산군에게 겉으로는 초의 회왕을 조문하는 듯 하나 실은 노산군(단종)을 조문하는 글이다. 정축년 10월은 노산군이 죽은 때이며, 항우는 세조에 비한 것이고, 회왕은 노산을 가리키며,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노산이 왜 진작 세조를 제거하지 않았냐?”라는 뜻이라고 구구절절 풀이했다.
유자광의 설명을 듣고 난 연산군은 “이 자들은 속으론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세조부터 성종까지)을 내리 섬겼으니, 생각할수록 두렵고 떨리는구나.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논하기를 "지금 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오니,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이들은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땅히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하소서.”
"김종직의 불신(不臣)한 그 심리는, 죄가 용납될 수 없사오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옵소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이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옵니다." 하였다.
심지어 김종직의 제자로 거론되던 표연말 · 홍한등도 극형을 주장했다.
그런데 집의 이유청과 사간 민수복 등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연산군은 "김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이렇게 말하니 이는 김종직을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당장 이들을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하였다. 이때 여러 재상과 대간과 홍문관원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장(羅將) 십여 인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집의 이유청 등은 그 자리에서 붙잡혀 형장 30대를 맞았다.
7월17일에 연산군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모두 잡아다가 국문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에 신난 유자광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할 양으로, 윤필상 등에게 눈짓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악은 무릇 신하된 자로서는 불공대천의 원수이니, 마땅히 그 도당들을 추구하여 일체를 뽑아버려야 조정이 바야흐로 청명해질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도당이 다시 일어나서 화란(禍亂)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니, 좌우가 다 조용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유독 선성부원군 노사신(1427∼1498)이 손을 저어 말리면서 하는 말이 ‘무령(武靈 유자광의 봉호)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오. 저 당고(黨錮 : 동한(東漢) 말년에 간신들이 천하의 명사(名士)를 명당(明黨)이란 죄명으로 일망타진하여 다시 벼슬하지 못하게 한 사건)의 일을 들어보지 못했소. 금망(禁網)을 날로 준엄하게 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족적(足跡)을 용납할 곳이 없게 하다가 한(漢)나라도 역시 망하고 말았으니, 청론(淸論)을 하는 선비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하오, 청론이 없어지는 것이 국가의 복이 아니거늘 무령(武靈)은 어찌 말을 어긋나게 하오.’ 하였다.
유자광은 노사신의 말을 듣고 조금 저지되기는 했으나, 오히려 뜻을 세우고 무릇 옥사(獄辭)에 연결된 자는 반드시 끝까지 다스리고자 하였다. 노사신이 또 말리며 말하기를, ‘당초에 우리가 아뢴 것은 사사(史事)를 위함인데, 지금 지엽(枝葉)에까지 만연되어 사사(史事)에 관계되지 아니한 자가 날마다 많이 갇히고 있으니,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지 않소.’ 하니, 유자광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급기야 죄를 결정하는 날에 노사신의 논의가 유독 같지 아니하니, 유자광은 낯빛을 붉히며 힐책하다가 각기 양론을 아뢰었는데, 연산군은 유자광의 의논을 좇았다. 3)
7월27일에 김일손·권오복·권경유는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고, 이목·허반도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이날 대낮이 캄캄하여 비가 물 쏟듯이 내리고, 큰바람이 동남방에서 일어나 나무가 뽑히며 기와가 날리니, 성중 백성들이 놀라 넘어지고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표연말·홍한·정여창·무풍정 총(摠)등은 난언(亂言)을 범했고, 강경서·이수공·정희량·정승조 등은 난언임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으므로 아울러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 밖으로 내치고, 이종준·최부·이원·이주·김굉필, 박한주·임희재(임사홍의 아들)·강백진·이계맹·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어 국정을 농단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였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리고 3천 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
또한 어세겸 · 이극돈 · 유순 · 윤효손 등 실록청의 사관들은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므로 파직되었다.
김일손이 사형당하는 7월27일에 연산군은 ‘백관이 모두 가보게 하라’고 명하고,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고유하고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했다.
김일손은 죽을 때 34세에 불과했다. 그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관이었고, 세조의 왕위 찬탈과 비행 그리고 훈구와 세도가의 부패와 탐욕을 실록에 기록함으로써 올바른 역사를 후대들이 기억하도록 했다.
패관잡기는 “계운(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어 죽었다”고 애석해 했고, 남명 조식은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라고 했으며 동춘당 송준길은 “김일손의 도학 · 문장과 정충직절(精忠直節)은 온 세상을 휩쓸었다”고 했다.
1464년에 경상도 청도에서 태어나, 1486년에 문과에 급제한 김일손. 그는 27세인 1490년(성종 21년)에 승정원 주서 겸 검열을 하면서 사관으로서 일했고 노산군의 ‘입후치제(양자를 세움)’를 주장하였다. 그 후 사간원 헌납, 병조좌랑, 이조정랑 등을 하면서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34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15세기 후반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했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직필로 역사투쟁에 나선 사관이었다.
김일손은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내일이 없고, 올바른 기록이 없으면 시대의 아픔을 극복할 수 없다는 역사에 투철한 올곧은 선비였다.
광주의 아픔도 마찬가지이리라.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기억됨으로써 대한민국 현대사의 아픔도 치유될 수 있으리라. 마치 탁영로에서 사관 김일손을 기억하듯이.
1) 종묘에 봉안된 현덕왕후의 신위는 1457년에 폐출되었다가 소릉이 복원된 1513(중종 8년)에 다시 봉안되었다. 그런데 1457년에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1441-1457)은 220년이 넘은 1681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2) 유자광과 김종직은 악연이 있었다. 유자광이 일찍이 함양(咸陽) 고을에 노닐면서 시(詩)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판자에 새겨 학사루 벽에 걸게 하였는데, 그 후 김종직이 이 고을 원님이 되어 와서, ‘유자광이 무엇이기에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라고 말하고, 즉시 명하여 철거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유자광은 성나고 미워서 이를 갈았으나, 김종직이 임금의 총애를 받아 한창 융성하므로 도리어 스스로 납교(納交)를 하고 종직이 졸(卒)하니 만사를 지어 통곡했으며, 심지어는 왕통(王通)·한유(韓愈)에게 비하기까지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29일자)
3) 연려실기술(이긍익 저) 제6권 /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무오년의 사화(史禍)는 유자광에 대한 서술부터 시작된다.
유자광(柳子光)은 부윤(府尹) 규(規)의 서자이다. 건장하고 날래며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에도 원숭이 모양으로 잘 타고 올라갔다. 어릴 때 무뢰배가 되어 장기와 바둑이나 두고 활쏘기로 내기나 하고 새벽이나 밤길에 돌아다니다가 여자를 만나면 낚아채어 간음하였다. 유규(柳規)는 자광의 어미가 미천한 신분이고, 또 하는 짓이 이처럼 방종하고 패역하므로 여러 번 매질하고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광은 글을 올려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세조(世祖)가 그를 기특히 여기고 불러다가 대궐 뜰에서 시험해 보았다. 이어 전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세조가 매우 사랑하였다. 병조 정랑으로서 문과를 보아 장원으로 뽑혔다. 예종(睿宗) 초년에 남이(南怡)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어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으며 벼슬의 등급을 뛰어 1품(一品)의 관계(官階)를 얻게 되었다. 상시 자기 자신을 호걸이라 일컬었다. 천성이 음험하여 남을 잘 해쳐서, 재능과 명망이 있어 임금의 사랑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하니 사람들이 그를 흘겨보았다. 자광이 한명회(韓明澮)의 문호가 귀하고 성함을 질투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종(成宗)이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받아들임을 보고 기이한 의논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고, “한명회가 발호할 뜻이 있습니다.”고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그를 죄주지 아니하였다. 후에 임사홍(任士洪)ㆍ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 하다가 계획이 실패되어 오히려 자기가 동래(東萊)로 귀양 갔다가 조금 후에 풀려 돌아 왔으나, 임금은 그가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인 줄 알므로 다만 공신의 봉작만 회복시켜 주고 실무에 당하는 관직은 주지 아니하였다. 자광은 임금의 은택 입기를 희망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썼으나 되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있었다. 이극돈(李克墩)의 형제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음을 보고는 능히 자기 일을 성취시켜 줄 수 있음을 알고 문득 몸을 굽혀 깊이 서로 결탁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은 남곤(南袞)이 지은 것이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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