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 기술 - 무오사화 (2) 유자광은 기획자였다.
○ 김일손이 헌납이 되어 권세 있는 사람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며 글을 올려,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처럼 당을 만들 것이다.” 라고 논하니 이극돈이 크게 노하였다. 후에 사국(史局)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열리자 이극돈이 당상이 되어 김일손이 쓴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상세히 쓴 것과 또 세조(世祖)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였다.어느 날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총재관(摠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김일손이 선왕(先王 세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미고 헐뜯었으니 신하로서 이 같은 일을 보고서 임금께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나의 생각에는 사초를 봉하여 위에 아뢰어서 처분을 기다리면 우리들은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어세겸은 깜짝 놀라면서 답하지 아니하였다.얼마 지낸 뒤에 극돈은 유자광에게 의논하니 유자광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뽐내면서, “이것이 어찌 의심하고 주저할 일입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을 찾아가서는 세조에게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점을 먼저 말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놓은 뒤에 그 일을 말하였다.대개 노사신과 윤필상은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고, 한치형은 그 족당이 궁중에 관련되었으니 반드시 자기의 말에 따를 것으로 알고 말했던 것인데 세 사람은 과연 모두 그 말을 따랐다. 함께 차비문(差備門) 밖에 나가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 내어 귀에 대고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 임금께 아뢰었다.이전에 신수근이 승지로 될 적에 대간과 시종신들은 외척이 권력잡을 발단이라고 하며 옳지 못하다고 힘써 간하였더니, 신수근은 이들에게 감정을 품고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조정은 문신들의 수중에 있는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일손 등에 대한 여러 사람의 원한이 뭉치고 뭉쳐 있었다. 또 폐주가 시기하고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글하는 선비를 더욱 미워하여, “명예를 구하고 임금을 능멸하여 나를 자유스럽지 못하게 한 자는 모두 이 무리들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항상 마음이 답답하고 불쾌하여 한 번 통쾌하게 처치했으면 하면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던 차에 유자광 등이 아뢴 말을 듣고, “이 나라에 충성한다.” 하면서, 특별히 후하게 칭찬하고 남쪽 빈청(賓廳)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하고 내시 김자원(金子猿)을 시켜 왕명의 출납을 맡게하고 나머지 사람은 참여해 듣지 못하게 하였다. 검열(檢閱) 이사공(李思恭)이 뵈옵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
○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에게 명하여 곧 함양(咸陽)에 가서 김일손을 잡아오게 하였다. 또 액정서(掖庭署) 하예(下隸) 중에서 말 잘 달리는 자를 시켜 죄인을 잡아오는 걸음이 더디고 빠른 것을 도중에 살펴 빨리 보고하라 하였다. 이때 김일손은 풍병(風病)으로 집에 있다가 잡혀 왔다. 폐주는 수문당(修文堂)에 나와서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는데,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ㆍ유자광(柳子光)ㆍ신수근(愼守勤)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이 국문에 참여하였다. 《야언별집》
○ 김일손을 국문할 때, “사초에 어찌하여 선왕조(先王朝 세조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썼느냐?” 하니 공술(供述)하기를, “사기(史記)에 ‘이보다 먼저[先是]’란 말도 있고, ‘처음에 이르되[初云]’란 말도 있으므로 세조 때의 일을 추기(追記)에서 기록했으며, 덕종(德宗)의 귀인(貴人) 권씨(權氏)의 일은 귀인의 조카되는 허반(許磐)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다. 또 소릉(昭陵) 회복을 청한 일을 국문하니, “선왕께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고려왕조)의 후손을 봉하기에 성조(聖朝)에서 인정(仁政)을 행하기를 원한 때문에 소릉을 복위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김일손이 일찍이 충청 도사가 되었을 때 글을 올려 소릉(昭陵)을 회복하자고 청한 때문에 아울러 국문한 것이었다. 또 후전곡(後殿曲)의 일을 국문하니, “옛날 서호(西湖)에 있을 적에 무풍부정(茂豐副正) 총(摠)이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와서 후전곡을 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애처롭고 슬퍼서 태평 세상의 음곡은 아니다.’ 하고 함께 논의한 일이 있었으므로 사초에 쓴 것입니다.” 하였다.“사초를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느냐?”고 두 번 세 번 추궁해 물었으나, 다만 “신은 자백을 다 했으니 혼자 죽겠습니다.” 하였다. 홍사호(洪士灝)가 김일손의 집 문서를 수색하여 이목(李穆)의 편지를 발견하였는데 그 편지에 사초에 관계되는 일을 대개 말하면서 “그대의 사초는 성중엄(成重淹)의 방(房)에 있는데,중엄은 날마다 일을 기록하지 않는 점을 들어 당상이 기재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으나 나는 김계운(金季雲) 일손의 자 은 글자 한 자도 빠뜨림이 없이 다 기록했다고 말했다.” 하였다. 폐주가 홍사호에게 묻기를, “김일손이 오는 도중에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일손이 ‘이것은 반드시 이극돈이 사초를 고발한 것이다. 극돈의 일을 내가 사초에 썼더니 극돈이 깎아 버리기를 청했으나 내가 듣지 않았으므로 원한을 품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허반(許磐)은 공술하기를, “덕종(德宗)의 소훈(昭訓) 윤씨(尹氏)의 일이 의심이 나서 김일손에게 말했더니, 일손이 필시 잘못 알고 권씨(權氏)로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이목(李穆)은 공술하기를, “노산군(魯山君)의 숙의(淑儀) 권씨(權氏)는 바로 권람(權擥)의 친족입니다. 그 논밭과 집과 노비를 권람이 다 차지하고 주지 않아서 숙의를 굶주리게 한 까닭으로 신이 일찍부터 권람을 하찮게 보았습니다.” 하였다. 이상 《야언별집》
○ 유자광이 옥사를 맡고 있었는데 매양 김자원(金子猿)이 임금의 명령을 전달할 때는 반드시 앞에 나아가서 공손하게 조심하는 태도를 다하여 그 명이 엄하고 혹독한 듯 하면, 스스로 임금의 마음을 안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면서 거듭 물러날 뜻이 있는 것처럼 하고서는 명을 다 듣고 물러 나와서는 매우 기뻐서는 스스로 자부하는 기색이 있었다.이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은 조정의 중신을 바꾸어 배치할 시기이니, 마땅히 이러한 큰 조치가 있어야만 될 것이고 보통으로 다스려서는 안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또 임금께 아뢰기를, “이 사람의 무리들이 매우 성하니 변고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방비를 엄밀히 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이에 금위병(禁衛兵)을 뽑아서 궁문 안팎을 경계하여 모든 사람의 드나드는 것을 단속시켰다. 옥에 갇힌 사람이 국문을 받으러 갈 때도 군사를 시켜 압송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오히려 옥사를 다스림이 느슨해져 제 뜻대로 다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 놓으니 바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이었다.그 중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 술주시는 유유(劉裕)가 임금을 죽인 죄를 꾸짖고 도연명(陶淵明)의 충분(忠憤)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를 들추어 내어 여러 추관(推官)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행실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고 제가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폐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내 아뢰기를,“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써 논죄하고, 그가 지은 글은 세상에 전파해서는 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폐주는 그 말을 따라 김종직의 시문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이틀 안으로 각기 자진해서 바치라 하고 빈청(賓廳)의 앞뜰에서 불사르게 하며,또 여러 도의 관사에 써 붙인 현판은 모두 그 곳에서 떼어 없애도록 하였다. 일찍이 성종(成宗)이 김종직에게 환취정(環翠亭)의 기문(記文)을 짓게 하여 문 위에 달아 두었었는데, 이것도 아울러 떼어 버리도록 청했으니 함양(咸陽)의 원한을 보복함이었다. 《유자광전(柳子光傳)》
○ 무오년 7월 17일에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김종직은 초야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조에 과거에 오르고 성종께서 경연에 뽑아 두어 오랫동안 시종의 지위에 있어 벼슬이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니 임금의 총애와 은혜가 조정에서 으뜸이었다. 그가 병들어 벼슬에서 물러나니 성종은 오히려 그가 있는 고을 수령을 시켜 특별히 쌀과 곡식을 내려 주어 그 여생을 마치게 하였다.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편수한 사초 속에 부도한 말로 선왕조의 사실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기재하였는데 그 글 내용은 이러하다.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양(密陽)에서 경산(京山 성주(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는데 그 날 밤 꿈에 풍채 좋은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걸치고 와서는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서초 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하여 빈강(彬江 중국 남방에 있는 강)에 빠져 잠겨 있다.」 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생각하니, 회왕은 남방 초(楚) 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조선(朝鮮))의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쳐죽여 그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글을 지어 그를 조문하노라. 하늘이 사물과 법측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그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 사람에게만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며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어졌으리오. 나는 동이 사람이고 천 년이나 뒤에 났는데도 삼가 초의 회왕을 슬퍼하노라. 옛날에 조룡(祖龍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을 휘두르니 사해의 물결이 모두 피로 물들었다. 비록 전어[鱣]ㆍ상어[鮪]ㆍ미꾸라지[鰍]ㆍ고래[鯢]인들 어찌 자신을 보전할 수 있으리오. 그 물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여 바쁘게 날뛰었다. 이때 6국(國)의 후손들은 세력이 없어지고 딴 곳으로 피란하여 겨우 평민과 같이 지냈다. 항량(項梁)은 남국(南國 초(楚))의 무장 집안의 자손으로서 진승(陳勝)에 뒤이어 일을 일으켰다. 회왕(懷王)을 찾아내어 백성의 바람을 따랐으니 멸망했던 초 나라를 다시 보존하게 되었다.건부(乾符)를 쥐고 천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미씨(羋氏 초의성)보다 높은 이가 없었다. 장자(長者 유방(劉邦))를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게 하니, 또한 그 인의(仁義)를 볼 수 있겠다. 양처럼 패려궂고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관군(冠軍 송의(宋義))을 함부로 죽였는데도 어찌 그 항우를 잡아 처형시키지 않았는가.아아, 형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회왕(懷王)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긴다. 길러 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으니, 과연 천운이 어긋났도다. 침(郴)의 산이 험하여 하늘에 닿으니 햇빛이 어둑어둑 저물려 한다. 침의 물이 밤낮으로 흐르니 물결이 넘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한 천지간에 한이 어찌 다하리오. 혼령이 지금도 정처 없이 헤매고 있구나.나의 마음이 쇠와 돌을 뚫을 만하니 왕(회왕)이 갑자기 꿈에 나타났도다. 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르려니 생각이 불안하고 조심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니 영령(英靈)이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 하였다. 그 글에 ‘조룡(祖龍)’이라 한 것은 진시황이니 종직이 의제(義帝 회왕(懷王))를 노산군(魯山君)에 비한 것이요.‘양처럼 패려궂고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관군을 함부로 죽였다.’는 것은 세조가 김종서 죽인 것을 가리킨 것이며, ‘어찌 항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 한 것은 노산군이 어찌 세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는 것이고, ‘길러 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다.’는 것은 노산군이 세조를 잡아 죽이지 않았다가 도리어 세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른다.’는 것은 김종직이 자기 스스로 주자인 체 하여 마음 속으로 이 부(賦)를 지어 《통감강목(通鑑綱目)》의 필법에 견준 것이다. 김일손은 그 글을 칭찬하여 ‘충분(忠憤)한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으니,생각해 보면 우리 세조 대왕이 불안하고 위태한 시기를 당해서 간악한 신하가 반란을 도모하여 화란(禍亂)이 거의 일어나려 할 때 역적의 무리를 베어 죽이니 종사가 위태한 지경에서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공업은 매우 높고 크며 덕은 백왕에 뛰어난데, 뜻밖에 김종직이 그 제자들과 더불어 세조의 덕을 비방하고 김일손을 시켜 사초에 무함하여 쓰기까지 하였으니,이것이 어찌 짧은 시일에 만들어진 것이랴.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몰래 가지고 있으면서 세조ㆍ예종ㆍ성종의 세 임금을 두루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 참혹하고 떨림을 금하지 못하겠다. 해당한 죄명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이세영일기(李世英日記)》ㆍ《조야기문(朝野記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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