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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김일손

무오사화 - 유자광 (연려실기술 연산조 고사본말 ) 김세곤

 

무오사화(1498년)를  유자광을 주인공으로 하여 정리한 것이다. 유자광은 무오사화 기획자였다.

 

 

연려실기술 제6권 (1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무오년의 사화(史禍)

유자광(柳子光)은 부윤(府尹) ()의 서자이다. 건장하고 날래며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에도 원숭이 모양으로 잘 타고 올라 갔다. 어릴 때 무뢰배가 되어 장기와 바둑이나 두고 활쏘기로 내기나 하고 새벽이나 밤길에 돌아다니다가 여자를 만나면 낚아 채어 간음하였다.유규(柳規)는 자광의 어미가 미천한 신분이고, 또 하는 짓이 이처럼 방종하고 패역하므로 여러 번 매질하고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광은 글을 올려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세조(世祖)가 그를 기특히 여기고 불러다가 대궐 뜰에서 시험해 보았다.이어 전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세조가 매우 사랑하였다. 병조 정랑으로서 문과를 보아 장원으로 뽑혔다.

 

 

예종(睿宗) 초년에 남이(南怡)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어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으며 벼슬의 등급을 뛰어 1(一品)의 관계(官階)를 얻게 되었다. 상시 자기 자신을 호걸이라 일컬었다. 천성이 음험하여 남을 잘 해쳐서, 재능과 명망이 있어 임금의 사랑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하니 사람들이 그를 흘겨보았다. 자광이 한명회(韓明澮)의 문호가 귀하고 성함을 질투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종(成宗)이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받아들임을 보고 기이한 의논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고, “한명회가 발호할 뜻이 있습니다.”고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그를 죄주지 아니하였다. 후에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 하다가 계획이 실패되어 오히려 자기가 동래(東萊)로 귀양 갔다가 조금 후에 풀려 돌아 왔으나, 임금은 그가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인 줄 알므로 다만 공신의 봉작만 회복시켜 주고 실무에 당하는 관직은 주지 아니하였다. 자광은 임금의 은택 입기를 희망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썼으나 되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있었다. 이극돈(李克墩)의 형제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음을 보고는 능히 자기 일을 성취시켜 줄 수 있음을 알고 문득 몸을 굽혀 깊이 서로 결탁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남곤(南袞)이 지은 것이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나왔다.

 

자광이 일찍이 함양군(咸陽郡)에서 놀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 판에 새겨 벽에 달아 두었다. 후에 김종직(金宗直)이 이 고을에 군수로 와서 이것을 떼어 불태워 버리면서,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였다. 자광은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면서도 김종직이 한창 임금의 신임을 받을 때였으므로 도리어 교분을 맺고 종직이 죽었을 때는 제문을 지어 울면서 그를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동각잡기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극돈(李克墩)이 일찍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성종(成宗)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서울에 향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싣고 다닌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그 사실과 또 뇌물 먹은 일을 사초에 썼더니 이극돈이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그 청을 거절하자 김일손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다. 국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