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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죽천 박광전과 시민여상

죽천 박광전과 시민여상 (視民如傷)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죽천 박광전(15261597)은 하서 김인후 · 고봉 기대승 · 미암 유희춘 · 일재 이항과 함께 호남오현(五賢)이다. 죽천 박광전을 기리는 용산서원(龍山書院)을 간다. 보성군 노동면에 있다. 준공식은 안 했지만 건물은 모두 지어졌다. 진선문(進善門)을 지나니 강당 용산서원과 동재 수인재(修仁齋), 서재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동재를 수인재, 서재를 숭의재라 이름 붙인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렇다. 죽천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함열현감 등을 하면서 인을 실천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의를 숭앙했다.

광해군의 사부였던 죽천은 1584년에 함열현감으로 근무했다. 함열현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부근이다. 박광전은 관사와 동헌 벽 위에 시민여상 (視民如傷)’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을 자애롭고 편안하게 다스렸다.

시민여상의 출처는 <춘추좌전(春秋左傳)> 애공(哀公) 원년(BC 494)이다. <춘추좌전>은 공자(BC 551BC 479)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노나라 역사서 <춘추>에 좌구명이 해설을 한 책인데, <춘추>에는 노나라 은공 원년(BC 722)부터 애공 16(BC 478)에 이르는 춘추시대 역사가 편년체로 실려 있다.

 

BC 494년은 오나라 왕 부차가 부친 합려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하여 월나라 구천을 굴복시킨 해였다. 부차는 BC 496년에 선왕 합려가 월나라 구천과의 싸움에서 죽자 2년간 와신(臥薪 : 땔나무 위에 눕다)하여 아버지 복수를 하였다.

이 시기에 오나라 부차는 초()나라를 공격하면서 진()나라에게 동참을 요구했다. 이에 진회공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상의했다. 이때 대부 봉활(逢滑)이 오나라의 요구를 거절할 것을 건의했다. 진회공은 초나라가 싸움에 패해 이미 왕이 망명한 상황인데 오나라의 청을 거절하면 후환이 두렵다하자, 봉활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는 이러한 일쯤은 많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작은 나라도 오히려 회복하거늘 하물며 큰 나라인 초나라가 어찌 회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나라의 흥성은 백성 보기를 상처 돌보듯이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복이 되는 것이고(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나라의 쇠망은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처럼 하찮게 여기는 데 있으니 이것이 화가 되는 것입니다.(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己禍也)’

 

초나라는 비록 덕이 없으나 백성을 베어 죽이지는 않습니다. 오나라는 백성을 전란 중에 끌고 다녀 백골이 풀 더미와 같이 널려 있으니 덕행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늘이 초나라를 깨우칠 가르침을 내린 듯합니다. 오나라가 재앙을 입을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진회공은 봉활의 의견을 따랐다.

 

그런데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처럼 여기는 나라는 망한다.’는 봉활의 말은 실현되었다.

 

오나라에 항복한 월나라 왕 구천이 21년간 상담(嘗膽 : 쓸개를 맛보다)하여 BC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인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는 지금의 중국 소주 · 항주 땅인 오 · 월간의 복수극에서 탄생한 것이다.

 

요컨대 시민여상(視民如傷)은 측은지심의 발로이고, 민본이며 주권재민이다.

 

지난 7월에 교육부 고위공무원이 기자들과 식사하면서 민중은 개, 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말하여 파문이 일었다.

 

작년에 방영된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국일보 논설주간은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1년도 안되어 현실이 되었다.

 

영화 베테랑’ · ‘내부자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면 헬조선이란 표현은 과언이나 자기비하가 아니다.

 

2500년 전 춘추시대 진나라 대부 봉활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土芥)처럼 하찮게 여기는 나라는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