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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호남이여!

영남학파 -

영남학파 嶺南學派

 

요약 16세기 말엽 이황·조식·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학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이황과 조식의 제자·문도 들로 구성된 학파를 가리켜 영남학파라고 한다. 이황과 조식 사이에는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은 없었으나, 그들의 학풍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도 영남지방 내에서 각각 달랐기 때문에 별개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은 안동권에 속하는 예안에서 활동하고, 조식은 진주권에 속하는 산청에서 활동함으로써, 그 학맥의 분포는 대체로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강좌와 강우로 갈라졌다. 그런데 조식의 학통은 비록 오건·최영경 등에 의해 그 맥이 이어졌으나, 정인홍 등이 주축을 이루었던 북인정권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학통이 붕괴되었다. 따라서 영남학파라고 할 경우에는 퇴계학파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목차

조선 초기에는 학문활동의 중심이 성균관을 비롯한 중앙 학계였기 때문에 지방에 근거를 둔 독자적 학맥과 학풍의 수립은 없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영남지방에서는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계보가 형성되었고, 성종조 무렵에 김종직의 제자들에 의해 영남사림파로 불리는 학자들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남학파라고 할 때는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성리학은 16세기부터 본격적인 이론적 탐구가 행해졌고, 그결과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상적 다양성은 당시에 학문이나 도덕적 실천에서 사우(師友)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결합하면서 16세기 말엽에는 이황·조식·이이(李珥)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각각 학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이황과 조식의 제자·문도 들로 구성된 학파를 가리켜 영남학파라고 한다. 이황과 조식 사이에는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은 없었으나, 그들의 학풍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황의 학풍이 이론적 탐구를 통해 성리학을 체계화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인간의 내면적 심성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반해, 조식의 학풍은 이론적 탐구보다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일상적 실천을 강조했으며, 그 실천도 내면적 심성 수양을 넘어서 사회적 실천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도 영남지방 내에서 각각 달랐기 때문에 별개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은 안동권(安東圈)에 속하는 예안(醴安)에서 활동하고, 조식은 진주권(晉州圈)에 속하는 산청(山淸)에서 활동함으로써, 그 학맥의 분포는 대체로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강좌와 강우로 갈라졌다. 그런데 조식의 학통은 비록 오건(吳健최영경(崔永慶) 등에 의해 그 맥이 이어졌으나, 정인홍(鄭仁弘) 등이 주축을 이루었던 북인정권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학통이 붕괴되었다.

 

따라서 영남학파라고 할 경우에는 퇴계학파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황의 문하에서는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 그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출현하고, 그뒤를 이어 정경세(鄭經世이현일(李玄逸장현광(張顯光) 등이 잇달아 등장함으로써 퇴계 학맥의 영남학파가 성립했다.

 

영남학파가 이이의 제자와 문도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이론적 대립의식을 명확히 하게 된 것은 이이 계열의 성리학자들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하자, 이이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을 비판하면서부터이다(이기이원론, 주리론). 17세기 전반에는 김해(金垓유원지(柳元之이구() 등이 이이의 성리설을 혼륜일변설(混淪一邊說)로 비판했으며, 17세기 후반에 오면 이현일이 이이의 성리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이황의 성리설을 옹호하는 이론 체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영남학파는 그 내부에서도 다양한 학맥이 형성되어 주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동지역에 따라 영남 북부권·중부권·남부권으로 구별했다. 북부지역에서는 또다시 안동권과 상주권(尙州圈)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안동권에서는 김성일-장흥효(張興孝)-이휘일(李徽逸)-이현일-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유필영(柳必永김도화(金道和)로 이어지는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안동권의 학맥이 확실하게 정립된 것은 이현일에 이르러서이며, 그 손제자인 이상정에 이르러 안동권의 학맥은 영남학파의 중심으로서 가장 큰 비중과 권위를 누리게 되어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상주권에서는 유성룡-정경세-유진(柳袗유원지로 계승되는 학맥이 형성되었다. 이 학맥은 안동권과 상당한 부분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도 학맥의 독자성에서는 경쟁적인 위치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안동권과 상주권은 모두 이이의 성리설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이황 학설의 정통성을 지키며, 그의 학설을 계승·발전시켰다.

 

영남 중부지역에서는 인동(仁同)의 장현광 계열과 성주(星州)의 정구 계열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퇴계 학통의 순수한 계승에 집착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학설·학풍을 수립한 특징이 있다. 먼저 장현광은 성리설에서 퇴계 학맥에 구애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이의 학설과도 달리 이기를 일도(一道)의 경위(經緯)로 파악하는 독자적인 이기경위설을 제시했다. 정구는 이황과 조식의 두 문하에서 수학했고, 정경세와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예학자이며, 그 자신은 이황의 성리설을 계승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의 학맥은 영남 안에서 발전되기보다는 기호지역의 남인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즉 정구-허목-이익(李翼)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그것이다. 그후 이익-안정복(安鼎福)-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지는 성호학파를 계승한 허전(許傳)이 다시 영남으로 돌아와 김해지역에서 활동했다. 19세기 성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성리학자로는 이진상(李震相)-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이 있었다. 이진상은 그의 숙부인 이원조(李源祚)의 영향을 받았으며, 안동권 유치명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퇴계 학통에서 전통적으로 인정해온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다. 이진상의 독자적인 성리설은 안동권과 상주권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비판과 배척을 받았으나, 그의 아들인 이승희와 제자인 곽종석에 의해 계승되었다. 19세기 후반경에 오면 영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성리학자들 가운데서도 호남의 기정진(奇正鎭)의 학맥을 잇는 노사학파(蘆沙學派)와 호남의 전우(田愚)를 추종하는 간재학파(艮齋學派)에 속하는 인물들이 나오기도 했다.기호학파, 이기이원론, 주리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