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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호남이여!

o 일베의 주장 : '호남의 인심은 속이고 거짓말을 한다.' [1744년,영조60권,20년,12월15일, 2번 째 기사]

o 일베의 주장 : '호남의 인심은 속이고 거짓말을 한다.' [1744,영조60,20,1215, 2번 째 기사]

 

o 일베가 주장하는 영조실록은?

영조 20년 갑자(1744) (건륭9)1215(무오)

20-12-15[02] 야대를 행하다. 원경하에게 세자의 권학, 호남 지방의 사정, 인심 등을 묻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참찬관 원경하(元景夏)에게 말하기를,

하루라도 여러 신하들을 보지 아니하면 나의 마음이 스스로 부끄럽다. 또 경을 보고자 하여 야대로써 부른 것이다. 내가 원량(元良)에게 학문을 권장하려는 마음이 있으나, 기운과 마음이 따르지 못하니 어찌하겠는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호남 지방에서 들으니, 성상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셨으나 오히려 강경(講經)과 윤대(輪對)를 그만두지 아니하신다고 하는데, 이것은 곧 위()나라 무공(武公)이 억계(抑戒)를 지은 뜻입니다. 군신(君臣)은 부자와 같은데, 혹은 와내(臥內)로 인입(引入)하기도 하고, 그 예모를 간략히 하더라도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유신들을 끌어들여 접촉하고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토론한 것은 바로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성대한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호남 지방의 백성들의 일에 대하여 물으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영남 지방의 70주는 절반이 왜인(倭人)들에게 미곡을 공급하므로, 국용(國用)은 오로지 호남 지방에 달렸는데, 조운(漕運)하는 여러 거자 일들은 모두 아무 대책도 없어 엉성하고, 선박의 재목도 또한 장차 산에 나무가 없어져 고갈될 것이니, 지금은 호남 지방에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비록 그들에게 책임지우기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60여 건의 옥사(獄事) 가운데, 아들이 아비의 집에 불을 지른 것도 있고, 전정(田政)은 백지(白地)에 조세를 징수하는 경우가 있으며, 뒤에 진전(陳田)으로 거듭 묵히는 것도 한 가지 고질스러운 병폐가 되지만, 세목이 비어 있는 가운데 도로 기경(起耕)하는 폐단도 있습니다. 각 고을의 하리(下吏)들도 또한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손을 쓸 만한 곳이 없으므로, 일족(一族)에게 징수하거나 독촉하는 자도 있고, 심지어 속전(續田)에 대해서는 5년을 기한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급하여 허둥대는데, 신은 기경(起耕)하는 대로 그 즉시 징세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은 어떠하던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대저 속이고 거짓말을 하지만, 강개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면, 나라가 위급할 때에 또한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귤 한 쟁반을 나누어 주자, 여러 신하들이 옷소매에 넣어서 나갔다.

원전43 165

분류*왕실(王室) / *행정(行政)

 

[D-001]억계(抑戒) : 억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이고, 계는 경계하는 글. ()나라 무공(武公)이 주()나라 여왕(厲王)을 풍자하고 또 스스로 경계하기 위하여 지은 시라 함.

원경하 1747

 

 

 

 

 

 

 

 

영조 23년 정묘(1747) (건륭12) 102(기미)

23-10-02[04] 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상소하다

호남 양전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그윽이 우견(愚見)이 있어 감히 이를 덧붙여 진달합니다. 부안(扶安)의 격포(格浦)는 곧 삼남(三南) 해로의 인후이며 심도(沁都)를 막아 지키는 땅입니다. 옛날 인묘조(仁廟朝)에 검영(檢營)을 특별히 설치하고 또 행궁(行宮)을 세웠는데, 곡식을 쌓아 놓고 배를 감추어 두었으니, 이는 먼 훗날을 헤아린 깊은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설의 규모가 중간에 여러 번 바뀌어 검영을 이미 파하고 다만 별장(別將) 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신이 변산(邊山)에 들어와 바다를 따라 60리를 가면서 형세를 두루 살펴보았더니, 고군산(古群山위도(蝟島)가 아득한 대양(大洋)의 중간에 나란히 우뚝 솟아 있는데, 양도(兩島)에 대해 바람을 타고 돛을 달면 3, 4일 지나지 않아 배를 댈 수 있습니다. 연미(燕尾)의 아래 격포는 양도와 함께 서로 기각(掎角)이 되고, 산이 항구 깊숙이 둘러져 있어 거센 바람과 심한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조선(漕船상박(商舶)은 항구에 들어오기 전에 무서운 파도와 큰 물결에 의해 표탕(漂蕩)되어 가끔 침몰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칠산(七山)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장년 삼로(長年三老)라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도·군산(群山금모포(黔毛浦) 4진이 수영(水營)에 이속(移屬)된 이후로 해마다 수군을 조련할 때 전함(戰艦)이 패몰(敗沒)하거나 방졸(防卒)이 익사하는 일을 더러 요행히 면하지 못합니다. 금년 가을에는 군산에서 조련하러 갔던 병졸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 40명이나 되어 과처(寡妻고아(孤兒)가 물가에서 슬피 울부짖었습니다.

신은 비로소 4진은 평소 검영에 소속시켜야지 수영에 소속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심도(沁都)의 응원이 될 뿐만 아니라 또 4진에서 수영에 가려면 바람을 기다렸다가 험지를 건너야 하므로 자칫 열흘이나 보름을 넘기게 되니, 설령 뜻밖의 경보(警報)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기간 내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미처 적을 방어하기도 전에 먼저 풍이(馮夷해약(海若)의 노여움을 만나게 될 것이니, 이 때문에 도신·어사가 전후의 소장에서 구제(舊制)를 회복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4진을 검영에 다시 소속시키고, 경진년(庚辰年)의 유제(遺制)를 본받아 검영의 중군(中軍)에게 첨사를 겸임시켜 격포에 유진(留鎭)하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봄·가을에 순력(巡歷)하여 4진의 전함·방졸(防卒)을 기회(期會)하여 항구의 앞 바다에서 조련하게 하면, 칠산에서 패선되고 익사하는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격포로 다시 해산(海山)의 관방(關防)을 삼으면, 훗날 국가가 위급할 때 반드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이 개량(改量) 때문에 나주(羅州영암(靈巖) 간을 왕래할 때 작설(綽楔)이 정리(井里)에서 훤히 서로 바라보이므로, 말을 멈추고 물어 보았더니, 충신의 집이 아니면 효자의 집이었습니다. 그 후손을 방문했는데 지금은 모두 쇠퇴하여 서민(庶民)으로 변하였으며, 고가(故家)의 유풍(流風유운(遺韻)은 다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호남은 예로부터 화려한 지방으로 일컬어졌는데, 수십 년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므로, 고기잡고 농사짓는 즐거움에 편안하지 못하고 헤어져 유랑하여 흩어졌으며, 옛날의 높고 큰 정자는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옛 사람들이, ‘원유(園囿)의 흥폐(興廢)로써 낙양(洛陽)의 성쇠(盛衰)를 안다.’고 하였는데, 신 역시 정자가 무너진 것을 보고 호남의 쓸쓸함을 슬퍼합니다.

 

!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의 순충(純忠대절(大節), 이후백(李後白박상(朴祥)의 문장과 아망(雅望) 정충신(鄭忠信)의 공적, 김덕령(金德齡)의 용기, 임형수(林亨秀임제(林悌)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배회하며 감개(感慨)하는 까닭이며, 성조(聖朝)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는 반드시 충신(忠臣) 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일개 도()를 수방(搜訪)한다면 인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간혹 문학(文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고, 간혹 행의(行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었으니, 감히 그 사람의 성명을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이이정(李頣正)은 고 수찬 이상형(李尙馨)의 후손이고, 민사하(閔師夏)는 고 사인(舍人) 민덕봉(閔德鳳)의 후손이고, 임대(林薱)는 고 유수 임영(林泳)의 족자(族子)이고, 김회(金烠)는 고 참판 김상옥(金相玉)의 족자이고, 신사철(愼師喆)은 고 부학 신천익(愼天翊)의 후손이고, 최필흥(崔弼興)은 고 평사 최경창(崔慶昌)의 후손이고, 고석(高晳)은 고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고, 안황(安煌)은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이고, 정민하(鄭敏河)는 고 상신 정철(鄭澈)의 후손입니다. 강진(康津)의 이의경(李毅敬), 영광(靈光)의 이중익(李重益), 무장(茂長)의 이만석(李萬錫), 장성(長城)의 유광현(柳光顯), 영암(靈巖)의 조석침(曹錫琛), 무안(務安)의 김경삼(金景森), 보성(寶城)의 김연년(金延年), 전주(全州)의 이익렬(李益烈정사협(鄭斯鋏)은 모두 글이나 읽고 뜻을 강논하며 곤궁한 것을 견디고 안정을 지키면서 혹은 백수(白首)에 이르도록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견발(甄拔)하여 그를 등용하면 혹 격려하고 권장하여 홍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일신(一新)을 지나다가 그 이른바 충렬사(忠烈祠)라는 곳을 두루 방문했습니다. 이복남(李福男) 7인의 충신(忠臣)을 여기에서 제사하는 데 의사(義士) 임박(林樸)을 배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신을 향하여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여러 공()들이 순국(殉國)한 절개는 진실로 모두 뛰어나지만, 의사의 죽음은 더욱 기이합니다. 정유년(丁酉年) 섬나라 오랑캐 적들이 쳐들어 와서 외딴 성()이 포위를 당하였습니다. 병사(兵使) 이공(李公)이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는데 의사가 개연(慨然)히 그를 따르며 말하기를, 죽으면 같이 죽을 뿐이다.라고 하고 적진으로 이격(移檄)하며 포위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적의 무리들이 의롭게 여기고 진()을 열었습니다. 병사와 의사가 갑옷을 입고 취라(吹囉)하며 말고삐를 끌어당겨 천천히 가니, 죽음을 마치 집으로 돌아 가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성이 격파되니 양원(楊元)이 포위를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성안의 사민(士民)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으며, 병사와 의사는 함께 뜨거운 불길로 들어가 죽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머리칼이 곤두섰습니다. 그 성취한 바가 그 같이 뛰어났는데도 조가(朝家)에서 정문(旌門)을 내리라는 명이 유독 임박에게만 미치지 않았으니, 그로 하여금 구천(九泉)의 아래에서 침울함을 억누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성세(聖世)의 궐전(闕典)이며 충절(忠節)한 사람을 표양(表揚)하는 바가 아닙니다. 임박은 지위가 낮아서 여러 신하들과 견장(甄奬)의 은전(恩典)을 함께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더욱 슬퍼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빨리 높이 포상하라 명하시어 교훈(敎訓)을 수립하시고 퇴락한 풍속을 치켜 세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부진(附陳)한 것에서 경의 소장을 머물러 두고서 경을 보고 하교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즉시 올라와서 복명(復命)하라.”

하였다.

원전43 263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 / *호구-이동(移動)

 

[D-001]장년 삼로(長年三老) : 뱃사공.

[D-002]풍이(馮夷) : 수신(水神).

[D-003]해약(海若) : 해신(海神).

[D-004]경진년(庚辰年) : 1700 숙종 26.

[D-005]견발(甄拔) : 인재를 구별함.

[D-006]정유년(丁酉年) : 1597년 선조 30.

 

영조 23년 정묘(1747) (건륭12) 1018(을해)

23-10-18[03] 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복명하니 호남의 사정에 대해 묻다

호남(湖南) 양전사(量田使) 원경하(元景夏)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원경하를 불러 보니, 말하기를,

신이 호남에 내려가니 개량(改量)이 작년 봄에 시역(始役)되었으므로 양사(量事)가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새로 일으켜 얻은 바가 6백여 결()이 되어 백징(白徵)의 숫자에 채워 보태고도, 남은 바가 오히려 1백여 결이 되었습니다. 신이 우리 성상께서 위에 있는 것을 덜어 아래에 보태주려 하시는 성덕(盛德)을 민간에 선양(宣揚)하고, 전주(全州)는 정탈(定奪)에 의거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농사를 보니 들은 바와는 달랐습니다. 해일(海溢)에 이르러서는 신이 격포(格浦)에서 길을 떠나 두루 살폈더니 재해를 입은 곳에는 모두 백모(白茅)의 마당이 이루어져 신이 보기에 해일이 아니라 바다에 씻긴 듯 하였습니다. 여산(礪山)에서부터 순천(順天) 등에 이르기까지 25()이 일시에 씻겨져 도정(道程)으로 말하면 거의 6, 7백 리가 되니, 이는 진실로 전에 있지 않았던 바입니다. 이것이 비록 근심스럽다고 하나 우역(牛疫)이 크게 극성하여 농우(農牛)가 다 죽어서 내년 봄에 장차 경작할 희망이 없는 것 역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역시 시기(時氣)가 도리어 어긋난 데서 온 것이다. 경이 천거한 사람이 대다수 18명에 이르는데 어떻게 다 등용하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호남은 옛날에 명공(名公거경(巨卿)이 많았습니다. 진주(晉州) 3장사(壯士)는 모두 호남 사람이고, 일신(一新)7충신 역시 모두 호남 사람입니다. 신이 인망(人望)을 채탐(採探)하여 지난번에 이미 소진(疏陳)했으나, 그 전에 이미 입천(入薦)되어 관직에 제수된 사람이 많았고,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혹은 출사(出仕)하지 않은 사람도 역시 많습니다.”

하고, 이어 여러 사람들의 성명 및 행의(行誼)를 두루 열거하고서 말하기를,

“18인은 신이 이미 천진(薦進)하였으니 조가(朝家)에서 견용(甄用)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문구(文具)인 듯하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호남에 좌도(左道)가 많은 것을 민망해 하셨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문학(文學행의의 선비를 거두시어 조가가 취하는 바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시면, 한 도()의 풍속이 혹시 크게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고석(高晳) 및 안황(安煌정사협(鄭斯鋏)은 대정(大政)을 기다릴 수 없으니, 자리에 따라 녹용(錄用)하고, 다른 사람들 중에 이미 녹용한 사람 이외는 일체를 조용(調用)할 것이며, 정유년(丁酉年)에 순절한 사람 임박(任樸)에게 증직(贈職)하라.” 하였다.

원전43 267

분류*농업-양전(量田)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보건(保健) / *인사-관리(管理)

 

[D-001]정탈(定奪) : 임금의 재결(裁決).

[D-002]정유년(丁酉年) : 1597 선조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