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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호남이여!

일베 주장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1601년 10.19 선조실록.

일베 회원의 주장

 

전라도는 속임수가 많다.' [1601,선조142,34,1019, 2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실록을 찾다.

 

선조 34-10-19[02] 상이 경상 등 도 도체찰사 이덕형을 인견하고 남방의 일 등에 대해 논하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경상 등 도 도체찰사인 판중추부사 이덕형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방비 등에 관한 일은 어떠한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탕패가 더욱 극심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처음 생각하기에는 영남은 땅이 넓고 곡식이 많아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었는데, 막상 두루 살펴보니 인민이 모두 죽어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처음 부산에 갔더니 중국인 방자(房子)만 조금 남아 있었고 좌도(左道)의 주사(舟師) 10여 척과 포작간(鮑作干) 수십 명뿐이어서 보기에 매우 한심하였습니다. 전일 이원익이 내려갈 때 토병을 불러 모으라는 전교를 받들고 갔기 때문에 금산(金山울산(蔚山창원(昌原) 등지에서 1천 명으로 한정하여 불러 모았습니다. 그랬더니 모민(募民)2()이고 군공(軍功)2초인데 남아 있는 대오(隊伍)의 군병은 560여 명이었습니다. 동래(東萊)1()560여 명이었고, 창원도 모민이 450여 명이었습니다. 병사(兵使)가 모은 사람도 거의 330여 명이었습니다만, 기계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사(舟師)는 전선이 매우 적어 갑자기 갖추기가 어려워 포작선(鮑作船)으로 대신 편성하였는데, 작은 배는 3백여 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용에는 힘입기가 어렵고 관병(觀兵)할 때나 쓸 계획입니다. 경주·성주·진주·대구 등처에서도 계속 불러모았습니다만, 민망스러운 것은 기계를 갖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영남의 일은 수삼 년을 지나 수습한 다음에야 모양이 이루어지겠습니다.

 

호남은 영남과는 달라서 백성들이 상당히 많습니다만 국가의 모든 경비를 여기서 판출하기 때문에 호조(戶曹)의 공문이 대부분 그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부역에 응하고 밖으로는 군병에 조발되어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이 극심합니다. 금년에는 주사에 소속된 각 고을의 부역을 감한 연후에야 명년을 지탱할 수 있겠습니다.

 

충청도의 경우는 소신이 오래도록 변방에 있었으므로 종사관을 시켜 그곳을 살피게 하였더니, 변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병비(兵備)에 관한 일이 더욱 말할 수 없는 정도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를 사장(辭狀)대로 체직시켜야 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신이 그곳에 있을 때 통제사가 청죄(請罪)한 일이 있었으므로 막 변장(邊將)을 추문하다가 끝내지 못하고 올라왔는데 그 사람이 먼저 사장을 냈습니다. 8월에 잔적(殘賊)이 연화(蓮花곡지(谷池) 두 섬에 머물러 몰래 통제사의 염막(鹽幕)에 들어가 사람을 잡아갔는데, 염간(鹽干)들이 숨어서 살펴보았더니 칼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는 무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평상시 미리 순라(巡羅)에게 살피게 하였으면 곧 잡았을 터인데 못하였습니다. 신이 그때 복병장(伏兵將)인 평산 만호(平山萬戶) 계지성(桂枝成)과 그 수하의 군졸 2명을 잡아다가 다방면으로 힐문하고 나서야 복병장이 당초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적이 도망가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군율이 이렇게 해이해졌습니다. 신이 계지성과 동시에 복병장이었던 임천 대장(林川代將) 박양국(朴亮國) 등을 거제도로 이수(移囚)하였는데 지금 추문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통제사를 체직시킨다면 마땅히 파출(罷黜)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선 그대로 두라. 주장(主將)은 적격자를 얻기가 어렵다. 대신할 만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삼도(三道)를 영솔하려면 반드시 물망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보기에는 이경준(李慶濬)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주와 명망은 같지 않은 것인데 이경준이 합당하겠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경준은 주사(舟師)의 장수를 겪지 않아 참으로 합당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전에 구원하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으로 갈 적에 군사를 지휘함에 법도가 있어 남방 사람들이 쓸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제장(諸將)들 가운데는 오직 전라 수사 유형(柳珩)이 성심으로 나랏일을 하려 하여 군졸을 아끼고 기계를 보수하며 군무 이외의 다른 일에 대한 호령으로 일호라도 각읍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쓸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경상 수사 이운룡(李雲龍)인데 완만한 듯하지만 자못 계려(計慮)가 있습니다. 다만 만호로부터 갑자기 올라와 이 직에 이르렀으므로 명망이 적은 듯합니다. 이들을 각별히 배양해 두었다가 뒷날 쓰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에 적변이 있게 된다면 사람들이 방어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흩어질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경주·울산 등 해변 사람들은 적과 싸우는 데 숙달되어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지금 피하려 해도 갈 곳이 없으니 적을 죽이고 죽겠다.’ 하고, 우도(右道)는 난리를 겪지 않은 곳에서는 인심이 전혀 이 같지 않아 흩어질 마음만 품고 있습니다.

 

대개 경상도는 인심이 순후하여 전라도처럼 속임수가 많지 않습니다만 근래에는 선비들의 의논이 크게 성하여 무비(武備) 등의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른바 사론(士論)이란 것은 시무(時務)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사분오열되면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이니, 위에 있는 사람은 진정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처음 내려갔을 때 보니 도내(道內)에는 하나도 활을 익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해야 하는 곳에서 그 인습이 이러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 지방에는 양반만 많고 양인(良人)은 적은데 양반이 된 자가 무예를 좀 익히게 되면 곧 뽑혀 부방(赴防)하는 대열에 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무예 익히기를 기피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경상도에서 시재(試才)할 때에는 능한 사람이 많았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그들은 대오(隊伍)에 편입된 사람들입니다. 신이 내려가서 대강 권장했는데도 그 효력이 이러하니 위에서 각별히 권장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별도로 무학(武學)을 설치하여 배우지 못하는 교생(校生)을 이곳에 소속시켜 잘 익히게 한다면 반드시 흥기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은 교생을 취재(取才)하여 입격되지 못한 사람은 곧 군사로 정하는데 이는 무예 익히는 길을 종용하는 것입니다. 소신이 전에 전라도 주사(舟師)에 소속된 13고을에 대해서는 공물을 완전히 면제하고 감영이나 병영에서 부역을 시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주사의 일만 위임시킬 것으로 이미 장계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의 회계(回啓)를 보건대 신의 장계와는 달랐는데 이는 충분히 살피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때문에 신이 올 때에 종사관 이홍주(李弘冑)를 보내어 감사와 함께 의논해서 조처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정(賊情)은 어떠한가, 별로 대거 출동할 기미는 없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신의 억측으로는 자중지란이 있어 나올 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대마도주가 강화하려 하는 것은 지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지성인 줄 아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그들의 이로움이 강화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거병(擧兵)하고자 한다면 대마도와의 강화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명년 봄에 평조신(平調信)이 나오게 된다면 매우 난처하니 미리 대응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응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형편으로 말하면 사실대로 병부(兵部)와 군문(軍門) 등처에 이자(移咨)하여 중국 관원과 협동한 연후에야 할 수 있습니다. 여름에 신이 이 일을 당하여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저들이 꺼리는 것은 중국군인 듯합니다. 때문에 도망병을 불러모으는 이러한 망령된 계책을 행한 것입니다. 지금 진주(陳奏)한다면 반드시 사실대로 고해야 됩니다. 당초 도망병을 불러모을 때에 소신이 그들의 근각(根脚)을 이미 힐문하여 장계를 올렸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이 어찌하여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돌아가지 않는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정상이 매우 가련합니다. 혹 군중에서 다쳐 돌아가지 못하는 자도 있고 혹 장사하러 나왔다가 가지고 온 물건을 잃어버려 돌아가지 못하는 자도 있고 혹 장수에게 죄를 지어 돌아가지 못하는 자도 있는데, 그들은 소금 장수나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 나라는 토지가 비옥하여 살아가기가 편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신이 불러모은 사람도 수백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 못된 자는 혹 서로 지금 우리들을 잡아 중국으로 보내려 한다면 적경(賊境)으로 도망하여 들어가겠다.’고 하니, 지금 병부에 사실대로 고하여 관원을 보내게 해서 와서 쇄환(刷還)해 가게 해야 합니다. 만일 한 관원을 보내어 부산 근처에서 그들을 모아 하나의 군진(軍陣)을 만들면 설령 적이 재침하더라도 중국군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어서 더욱 좋습니다.

신이 변방에 있으면서 보건대, 시습(時習)이 잘못되어 지금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적을 막을 설비라든가 군병을 모아 연습시키는 등의 일을 각 고을에서 전연 유념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 지려가 있다는 사람도 이러한데 어리석은 백성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마구 나돌아 말릴 수가 없는 데다가 상벌이 분명하지 못하고 기강이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일을 맡은 사람들이 조정의 본의는 체념하지 않은 채 어떠한 한 가지 일을 시행하면 이것은 상사(上司)의 명령이요 내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하민들은 이 말을 믿고 더욱 원성이 자자합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전혀 거행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은 외적(外賊)을 막을 뿐만 아니라 내변(內變)에도 대비하는 것이니, 하삼도에 하유하여 다시 신칙시키소서. 그리하여 착실하게 거행하는 수령은 상을 주고 힘쓰지 않는 수령은 벌을 주어야 합니다. 신이 그곳에 이르러 보니 해사(該司)에서 복정(卜定)하는 일이 계속 내려갔는데 소신이 순찰하여 이르른 때에는 곳곳에서 정소(呈訴)하였습니다. 신이 1년간의 징수를 알고자 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매달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고, 경상도는 공물(貢物)을 모두 면제하고 진상물(進上物)만 바치게 하였는데도, 쌀과 베가 매우 많았습니다. 더구나 양호(兩湖)는 국가의 경비를 그곳에서 모두 판출하게 되니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유년은 대적이 침입한 때인데도 그 해의 공물을 추징하고 있으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각별히 감면하게 하고 모든 국가의 경비도 모두 재정(裁定)하여 오로지 군비에만 뜻을 두어 백성들에게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한 연후에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청도는 인심이 극악(極惡)하니 병영·수영·감사를 검칙하지 않을 수 없는데 순찰사를 파한 뒤부터는 서로 맞먹기 때문에 매사에 방해가 되니, 반드시 순찰사를 겸임시켜야 호령이 행해질 수 있습니다.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의 일은 인심이 좋지 않은 곳에서는 입도 열기 어렵기 때문에 전라도와 충청도는 분부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원래 이 두 곳은 염려가 많은 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에 은미한 뜻이 있는 것 같은데 인심이 좋지 않다고 여겨서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호서는 인심이 영악하고 호남의 광주·나주 등은 호령이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국법을 두려워할 줄 알게 한 뒤에야 모든 일을 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국가에서 무장(武將)을 배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궐과(闕窠)가 나면 임명된 자가 으레 앞 사람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충청도의 전 병사 구사직(具思稷)은 위인이 완만하여 국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계를 올려 파직시켰는데 대신 임명된신 병사 권준(權俊).사람은 또 사직보다도 못합니다. 지난 번 신이 조보(朝報)를 보니 수원의 부사도 제대로 임명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미리 명망 있는 사람을 배양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지난 날 조정에서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선임하여 썼는데 우리 나라는 이런 등의 일에 대해 으레 일시에 갑자기 추천하여 하기 때문에 실상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도내의 실적이 있는 무관을 가려서 천거하게 하되 만일 잘못 천거하면 아울러 연좌시키게 하는 것이 이보다 나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휘할 일이 있으면 책임진 도에 호령하여야 한다. 나는 체찰사의 임무를 체직하지 않았으니 경은 알고 있으라.”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은 미열하여 친히 임지(任地)에 가도 일을 제대로 못하는데, 더구나 여기에 있으면서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명년에 평조신(平調信)이 오면 대응책이 매우 중하여 절절이 난처하니 미리 강구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화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필경에는 사세가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만 우선은 끌어나가면서 형세를 살펴야 합니다. 신이 주사(舟師)를 보니 금성 탕지(金城湯池)가 푸른 물결 위에 진열되어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주사의 장수가 현명하다면 용겁(勇怯)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쓸 수가 있습니다. 다만 해상에서 방수(防戍)하는 괴로움은 사람들이 견뎌 내기 어려우니 반드시 조정에서 위유(慰諭)하고 소속된 각 고을의 요역(徭役)을 각별히 감면해야 합니다.

경상도는, 평소에는 정호(正戶)7만에 솔정(率丁)이 모두 20여 만이었는데 난후에 갑병·기병·보병으로 나누어 정하였는데 이를 통틀어도 겨우 1만여 명입니다. 이것을 병영과 수영에 분속(分屬)시킨들 어떻게 모양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수령들을 시켜 공사천(公私賤)을 물론하고 모두 아병(牙兵)으로 뽑아 수시로 연습시키게 하였습니다. 이는 원군(元軍) 이외에 별도로 조련하는 군대이니 조정에서 각별히 하서하여 권장하여야 합니다. 신이 지난 번 잘 다스리지 못한 수령을 파직시킬 때, 나주와 남원도 아울러 체직시키려 하였으나 미처 못하였습니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평시에도 큰 곳인데 난후에는 운봉(雲峯)과 곡성(谷城)을 합쳤으므로 토지가 더욱 넓어졌습니다. 이사명(李思命)이 부사가 된 뒤부터 다스려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소한 품관(品官)들도 부역에 나가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나주 목사 권협(權悏)은 위인이 용렬하여 마음을 다하고 싶어해도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 두 고을에 대해서는 금년내에 이 두 사람을 체직시키시고 재주와 기국이 있는 사람을 가려 보내어 제때에 조치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신시(申時)에 파하였다.

원전24 305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외교-() / *외교-() / *재정(財政) / *호구(戶口) / *신분-신량역천(身良役賤) / *풍속-풍속(風俗) / *수산업(水産業)

 

 

[D-001]정유년 : 1597 선조 30.

 

평가 : 이덕형의 말 한 마디가 전라도 사람들 전체의 성격으로 매도되다니.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일베의 전략이다.

 

1019일의 실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경상도는 방어할 능력이 없고, 전라도는 세금을 거의 부담하고 있어 불만이 있다는 이덕형의 보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