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백리 칼럼

삼정이정청과 망국 조선 김세곤 글

 삼정이정청과 망국 조선

 

시아버지는 상복 벗은 지 오래고

갓난애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네.

하소연 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 관청에 지켜 섰고,

이정 里正은 호통치며 소마저 끌고 가네.

방에 드니 흘린 피 자리에 흥건하고

남편은 아이 낳은 죄를 한탄하네.

 

 

1803년 가을에 강진에서 유배 중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한 농부 이야기를 듣고 위 시를 짓는다. ‘애절양(哀絶陽)’, 남자의 거시기를 절단한 것을 슬퍼하는 시이다.

 

1821년에 다산은 <목민심서>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백성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1800년에 개혁 군주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뒤 헌종, 철종에 이어진 60년간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일부 가문이 권력을 움켜쥐고 매관매직을 일삼아서 세상은 부패하였다.

 

돈으로 관직을 산 지방 수령들은 본전을 뽑으려고 백성들을 더욱 수탈하였고 삼정(三政)이 문란해졌다. 삼정은 농지에 대한 세금인 전정(田政), 병무행정인 군정(軍政), 빈민 구제행정인 환정(還政)을 뜻하는데 각종 탈법과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1862년에 농민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졌다. 임술농민항쟁이었다.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시작한 농민항쟁은 진주로 번졌고, 그 불길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일대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제주도와 함경도까지 확산된 전국적 규모의 농민항쟁은 조선 개국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농민항쟁이 삼정문란에 있다고 보고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농민항쟁이 조금 수그러들자 삼정이정청은 철폐되고 말았다. 지배층이 기득권을 포기할 리 만무하였다.

 

1863년에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였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들을 몰아내고, 서원을 철폐하였고, 호포제와 사창제 등을 실시하여 농민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일련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은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봉건 조선을 유지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10년간의 대원군 집권이 끝나고 187311월에 고종이 친정하게 되자 민비가 배후에서 고종을 움직였고 여흥 민씨가 권력을 잡았다. 이후 대원군과 민비사이에 갈등이 지속되었다.

 

18941월에 전봉준은 고부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삽시간에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놀란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에 수습을 요청하였고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막강하다고 소문난 청나라 해군 북양함대는 일본에 힘없이 패하였다. 부패 때문이었다. 여제(女帝) 서태후가 북경의 이화원을 중수하느라 해군예산을 전용하였다. 북양함대에는 포탄이 단 세발 밖에 없었다 한다.

 

1910년에 조선이 망했다. 왜 망하였나?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한 일본의 야욕이 주된 이유지만, 조선 임금들의 무능과 지배층의 부패도 크게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