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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와 호남

시모노세키조약과 춘범루 , 남도일보 4.13자

김세곤 칼럼시모노세키 조약과 춘범루(春汎樓)

오치남 기자  |  ocn@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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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12  17: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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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시모노세키 조약과 춘범루(春汎樓)

1895년 4월17일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에게 무릎을 꿇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빌미가 되어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8개월 20일 만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종주국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였고, 요동반도와 대만·팽호도의 할양과 은 2억 냥을 배상하는 조약에 조인하였다. 2월에 시모노세키 여행을 하였다. 먼저 찾은 곳은 아카마 신궁 옆에 있는 춘범루(春汎樓)이다. 춘범루 입구에는 ‘사적 춘범루·일청강화담판장’ 이란 표석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요정 겸 여관이었던 춘범루를 자주 찾았다. 여기에서 만난 기생 우메코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춘범루앞에 ‘일청강화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가운데에는 ‘강화회의장’이 재현되어 있다. 삼면 벽에는 전시물이 여러 개 있다. 조약전문, 이홍장이 머문 인접사(引接寺) 사진, 그리고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 등이 걸려 있다.
이홍장이 쓴 글씨는 ‘해악연하(海岳煙霞)’이다. 산악 같은 큰 바다에 자욱한 안개와 노을. 한 폭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속내는 일본에 굴복한 청나라의 비참으로 비춰진다.

그러면 일청강화회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1895년 3월19일 시모노세키에 이홍장이 도착했다. 이 당시 일본은 북경 진격을 앞두고 있었다.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이유는 부패였다.
북양함대는 청나라 해군의 위용을 자랑하였으나 사실은 빈 껍데기였다. 함대에는 포탄이 단 세발밖에 없었다 한다. 여제(女帝) 서태후가 해군 예산을 이화원 복원에 전용한 결과였다.

3월20일에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춘범루에서 제1차 회담을 시작했다. 1885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이토가 중국 천진까지 달려가서 만난 지 10년 만이었다. 이제 두 사람의 입장은 역전되었다. 이홍장은 저자세였고 이토는 도도했다. 이홍장은 휴전부터 제안했다. 이토는 논의해 보겠다고 응수했다.
3월21일에 제2차 회담이 속개되었다. 이번에도 의제는 휴전이었다. 이토는 휴전 조건으로 천진과 산해관을 일본에 양도할 것 등을 제시했다.

3월24일에 제3차 회담이 열렸다. 이홍장은 더 이상 휴전 문제를 논의하지 말고 강화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토는 다음 날 강화조건을 제시하겠다고 하였다.
회담 후 이홍장은 숙소인 인접사로 향하였다. 이홍장이 탄 가마가 모퉁이를 막 돌 때였다. 갑자기 괴한 한 명이 달려들어 권총을 발사했다. 탄환은 이홍장의 왼쪽 광대 뼈 아래를 뚫고 들어가 왼쪽 눈 밑에 깊이 박혔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총탄이 금테 안경에 맞은 것이 행운이었다.
저격범은 26세의 극우주의자였다. 그는 끝까지 전쟁을 하여 청나라를 항복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강화회담을 저지시키고자 이홍장을 저격한 것이다.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메이지 천황이 성명을 발표하고 육군 군의총감을 보내는 등 법석을 떨었다.

이홍장의 피습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다. 일본이 세계의 이목을 의식하여 유연해진 것이다. 4월10일에 이홍장이 회담장에 다시 나왔다. 이후 협상은 급진전되어 4월17일 제7차 회담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런데 조약 체결 6일후인 4월23일에 러시아·프랑스·독일이 간섭을 하였다. 일본에 요동반도를 포기하도록 압박을 가한 것이다. 일본은 분노하였으나 3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본은 5월5일 요동반도 반환에 동의했다.
이러하자 고종과 민비는 친러로 돌아섰고, 일본은 군비확장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10년 후 러일전쟁에서 이겼다.

이제 기념관을 나온다. 기념관과 춘범루 사이에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 대신 무쓰 무네미쓰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항구로 가는 길목에는 ‘이홍장도(李鴻章道)’가 있다. 이홍장은 피습을 피하기 위하여 이 길을 따라 인접사를 오갔다 한다. 역사란 참 아이러니 하다. 영광과 치욕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으니….
<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