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강 고정주와 영학숙(英學塾)
‘슬로시티 창평’은 개화의 요람이다. 1906년 4월에 호남 최초의 신학문의 요람 영학숙(英學塾)이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춘강 고정주(春崗 高鼎柱 1863∼1933)이다.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출신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으로 18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 규장각 직각(直閣·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복합 상소하여 을사늑약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정주는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이 때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영학숙을 설립하였다. 강의실은 창평읍에서 약 5리쯤 떨어진 월동에 있는 문중의 민가를 빌렸다. (일설에는 ‘상월정’이라고도 한다) 고정주는 서울에서 이표라는 사람을 교사로 특별 초청하였는데, 그는 영어·일어 등 외국어는 물론이고 수학·역사·지리, 심지어 체육까지 잘 하는 만능교사였다.
개원 초기에 학생은 고정주의 둘째 아들 남강 고광준(1882∼1950)과 사위인 인촌 김성수(1891∼1955) 두 사람이었다. 김성수는 1903년에 그보다 5살 연상인 고정주의 딸 고광석(1886∼1919)과 혼인하였다. 고정주가 영학숙 설립 이유 중 하나는 아들과 사위의 해외유학을 위해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아들 고광준이 상해 유학을 갔으나 어학 때문에 귀국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영학숙이 개설 된 지 두 달 후에 담양 출신 고하 송진우(1890∼1945)가 입학하였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과 고정주는 세세로 친교가 있었다. 일찍이 송진우는 호남 의병장 기삼연(1851∼1908)의 제자였다. 기삼연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거병했다가 실패하여 왜병에게 쫓기었다. 그는 1896년 초에 송씨 마을에 숨어 송씨 문중 식객이 되었고 여섯 살인 송진우를 4년간 가르쳤다. 고하(古下)라는 호도 기삼연이 지어준 것이었다. 고비산(古比山) 밑에서 낳았으니 고비산처럼 꿋꿋하게 살라는 뜻에서였다.
기삼연은 1907년 10월에 김익중·김용구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호남지역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고창·영광·장성 등에서 기세가 대단하였는데 담양 금성산성 전투에서 패한 후, 기삼연이 1908년 2월3일에 광주천변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여 사실상 막을 내렸다. 송진우는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을 오려가지고 주머니에 가지고 다닐 정도로 비분강개파이어서 김성수는 그를 ‘벼락대신’으로 불렀다. 반면에 김성수는 조용하고 학구파인 현실주의자였다.
이어서 장성출신 김시중과 영암의 현준호가 조금 늦게 입학하였다. 현준호는 3천석 지주 현기봉의 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장성 출신 김인수도 합류하였다. 영학숙은 학생이 6명이었지만 김성수·송진우 등은 한국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이었다. 그런데 영하숙은 사실상 1년을 못 넘겼다. 송진우는 6개월 후에 ‘이곳은 아무래도 우물안이다’라며 짐을 챙겨 돌아가 버렸고, 김성수도 그 해 겨울에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갔다.
1907년에 고정주는 영학숙을 창흥의숙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창흥의숙은 다시 1909년 4월에 창흥학교로 개칭되었다. 창흥학교 1기 학생이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1887∼1964)이다. 순창출신 김병로는 1906년에 최익현 의병에 가담하기도 한 우국지사였다. 슬로시티 창평에는 고정주 고택이 자리 잡고 있고, 창평초등학교 입구에는 ‘창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학교 교정에는 창흥의숙 표석이 있고, 역사관에는 창평초등학교의 역사와 고정주 흉상·교지·칙명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1907년 7월에 춘강 고정주는 호남학회(湖南學會) 회장이 되었다. 호남학회는 호남지역의 교육진흥을 위해 평안도의 서우학회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애국계몽단체로서 ‘호남학보’를 발간하였다. <호남역사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