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집 제5권 |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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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을 곡하다〔哭海鶴〕 |
탈속하고 탁이했던 칠 척의 몸 / 歷落嶔奇七尺身
늘그막 풍상이 슬프기도 하네 / 風霜到老足悲辛
의류한 세월 오래여도 객이 되기 어려웠고 / 依劉歲久難爲客
매옥한 산 거칠어 가난을 벗지 못하였네 / 買沃山荒不救貧
채택이 진으로 갈 때는 운이 따라 주었지만 / 蔡澤入秦還有數
송경이 초로 갈 때는 사람이 없는 걸 어쩌랴 / 宋牼之楚奈無人
아아, 큰 뜻은 끝내 지우(知遇)를 얻기 어려웠으니 / 吁嗟志大終難遇
닷 섬들이 빈 박을 뉘 다시 진귀해하리 / 五石空瓠孰復珍
만리 먼 길을 마음껏 내달리니 / 長途萬里恣奔馳
준마(駿馬)라 매 놓을 순 없었던 게지 / 要是龍駒不可羈
의병 격문 지을 적에 재주 약간 시험했고 / 義檄風生才薄試
흰머리 단발하는 등, 늙을수록 기이했네 / 剃刀雪落老逾奇
하늘에 물어 공연히 연제할 날 기다렸고 / 問天空待燃臍日
나랏일 꾀하느라 자주 설지의 기회 놓쳤네 / 謀國頻違囓指期
알겠네, 웅심이 사그라진 뒤엔 / 認得雄心消耗處
저포로 다 탕진하고 유지와 늙어 갔네 / 樗蒲散盡柳枝衰
여관 등불 가물댈 제 침상에 누웠더니 / 逆旅燈玄臥倒床
북에서 온 소식은 점점 더 처량하네 / 北來消息轉凄凉
괴질로 죽을 거란 말이 씨가 되었던가 / 奇癥不起言成讖
사람들 입으로 전해 고향까지 부음 왔네 / 衆口相傳訃到鄕
달관한 그대야 객사를 슬퍼했으랴만 / 子達何曾悲客死
위급할 때 인재 줄어 나는 애통하다네 / 時危吾自慟人亡
관 하나론 영웅의 기개 거두기 어려울 터 / 一棺難戢英雄氣
무지개가 시신 싼 거적 곁에 떠오르리 / 應有虹騰藁葬傍
당나라의 두목이요, 한나라의 진등이라 / 唐時杜牧漢陳登
고금을 돌아봄에 한층 더 한스럽네 / 今古商量恨一層
인재 없는 이때에 그대가 또 떠났거늘 / 人物眇然君又逝
세상에선 부질없이 그 문장만 기리누나 / 文章餘事世空稱
뼈는 썩어도 의범(儀範)은 늘 남을 텐데 / 懸知骨朽儀常現
돌아온 혼은 꿈에는 안 보이네 / 縱有魂歸夢莫憑
종석산 남쪽 대숲 속에 거처하는 / 鍾石山南深竹裏
승려가 오히려 초서 등잔을 가리키네 / 居僧猶指草書燈
밤새도록 부엉이 소리 찬 여관에 깊은데 / 終夜鵂鶹冷館深
지는 달이 창 너머로 관 위를 비추네 / 隙窓殘月照棺衾
벼슬은 한미해도 명정(銘旌) 치장 호사롭고 / 官寒尙侈題旌字
박한 염습은 그런대로 과혁의 뜻에 부합하네 / 殮薄粗酬裹革心
경외의 푸른 산 선영이 가까운데 / 京外山靑先隴近
그림 속 흰머리가 먼지에 덮여 희미하네 / 畫中頭白暗塵侵
하늘 근처 날벼락에 사람 자주 놀라는데 / 近天霹靂驚人屢
누가 멀리 중천으로 그런 소식 전해 줄까 / 誰向重泉遠寄音
[주B-001]기유고(己酉稿) : 1909년(융희3), 매천이 55세이던 해에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다.
[주C-001]해학(海鶴) : 조선 말기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계몽운동가인 이기(李沂, 1848~1909)의 호이다. 자는 백증(伯曾)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전북 김제(金堤)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시재(詩才)로 이름을 날렸으나, 과거에 수차례 낙방한 뒤로는 실학자들의 저술을 연구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문명을 목도하고 감명을 받아 단발하였다. 귀국 후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냈다. 1906년(광무10)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계몽활동을 하였으며, 을사오적의 처단을 위해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실행에 옮기려 하다가 체포되어 전라도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났다. 석방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호남학회(湖南學會)의 간부로서 계몽적 글들을 발표했다. 1909년(융희3)에는 단군교(檀君敎)를 창립하는 데 가담했고, 그해 7월 서울의 여사(旅舍)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주D-001]의류(依劉)한 …… 어려웠고 : 오랜 세월 세력가에게 의탁하였으나,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의류는 세력이나 명망이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권21 〈위서(魏書) 왕찬전(王粲傳)〉에, “황문 시랑(黃門侍郞)에 제수되었으나, 서경(西京)이 소란하였으므로, 마침내 나가지 않고 형주(荊州)로 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하였으나, 유표는 그의 외모가 보잘것없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소홀히 대하고 중용하지 않았다.” 하였고, 당(唐)나라 시인 허혼(許渾)의 시에, “대궐에 조회하고자 하여 잠깐 유표에게 의탁한다.〔欲朝金闕暫依劉〕” 하였다. 《全唐詩 卷536》
[주D-002]매옥(買沃) : 옥주산(沃州山)을 매입하였다는 뜻으로, 은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고승인 축잠(竺潛)이 섬산(剡山)에 은거할 적에, 고승 지둔(支遁)이 옥주(沃洲)의 작은 고개를 매입하기를 청하였는데, 축잠이 “오고 싶다면 주기는 하겠으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산을 사서 은거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니, 지둔이 몹시 부끄러워했던 고사가 있다. 당나라 시인 유장경(劉長卿)의 〈송방외상인(送方外上人)〉 시에, “옥주산을 매입하지 말라. 당시 사람들은 이미 그곳에 있음을 안다네.〔莫買沃洲山 時人已知處〕” 하였다. 《會稽志 卷15》
[주D-003]채택(蔡澤) : 전국 시대 연(燕)나라 사람으로 변설에 능하였다. 조(趙)나라, 한(韓)나라, 위(魏)나라를 다니며 유세하였으나 모두 중용되지 못하다가, 진(秦)나라에 들어갔을 때 당시 재상인 범수(范睢)가 그를 알아보고 자신의 후임으로 소왕(昭王)에게 추천하여 객경(客卿), 승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史記 卷79 范睢蔡澤列傳》
[주D-004]송경(宋牼)이 …… 어쩌랴 : 채택을 추천해 준 범수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송경은 선진(先秦) 때의 사람으로, 송견(宋鈃) 또는 송영(宋榮)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와 진나라가 전쟁을 벌이려고 할 때, 그 싸움을 말리기 위해 초나라 제후를 찾아가던 길에 맹자(孟子)를 만났는데, 맹자는 그가 그 싸움이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가지고 설득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차라리 인의(仁義)를 가지고 설득하기를 권했던 고사가 있다. 《孟子 告子下》
[주D-005]닷 섬들이 빈 박 : 나름대로 훌륭한 용도가 있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물을 가리킨다. 혜자(惠子)가 어느 날 친구인 장자(莊子)에게, “위(魏)나라 왕이 보내 준 박 씨를 심었더니, 다섯 섬들이 박이 열렸네. 그렇지만 호리병처럼 쓰자니 물 무게를 지탱하기 어렵겠고,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너무 넓어서 쓸 수가 없겠더군. 속이 텅 비고 크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 부수어 버렸네.”라고 하자, 장자가 사물의 특성을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한다고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자네에겐 다섯 섬들이 바가지가 있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큰 통으로 만들어 강호에 띄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것이 너무 커서 쓸데가 없다고 걱정만 하는가.” 하였다. 《莊子 逍遙遊》
[주D-006]의병 격문 : 이기가 1894년(고종31) 동학혁명(東學革命) 때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조정의 부패한 관료들을 제거하라고 격려하였으나, 농민군의 폐해가 심하게 나타나자 도리어 군중을 모아 그들을 토벌하는 선봉에 섰던 일이 있는데, 그때의 일을 지칭하는 듯하나 명확하지 않다. 참고로 1895년 안동부(安東府)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그런 수구적인 방식의 의병 활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안동부 관찰사 이남규(李南珪)의 막료가 되어 모병과 군사 조련을 담당하여 의병 토벌에 큰 공을 세웠던 적이 있다.
[주D-007]흰머리 …… 기이했네 : 이기가 노년에 자진해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는 등의 기행을 한 것을 가리킨다. 매천의 이 시구에 대해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근래에 이기라는 자가 있어서 시문에 능하였는데, 아비가 죽었을 때 상복을 버리고 검은 옷을 입었으며, 연전에 학보(學報)에서는 사람들에게 독서하지 말 것을 권하면서 즐겨 유림(儒林)을 욕하였다. 이자야 진실로 나무랄 것이 못 되나, 마침내 어떤 문사(文士)가 그 사람에 대한 만사(輓詞)를 지으면서, ‘흰머리 단발하는 등, 늙을수록 기이했네.〔剃刀雪落老愈奇〕’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소롭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艮齋集 後編 續 卷4 答孫周夏》
[주D-008]연제(燃臍) : 배꼽을 태우는 것으로, 원흉이 처벌받아 죽는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동탁(董卓)이 처벌받아 그 시신이 저자에 버려졌는데, 평소에 비만했던 터라 뜨거운 날씨로 인해 지방이 녹아 흥건히 흘러나왔다. 그 주위를 경계하던 아전이 동탁의 배꼽 위에 불을 붙이니, 여러 날 동안 환하게 타올랐다고 한다. 《後漢書 卷102 董卓列傳》
[주D-009]설지(囓指) : 손가락을 깨문다는 뜻으로, 부모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증삼이 한번은 공자를 따라 초나라에 가 있을 때 갑자기 마음이 섬뜩하여 즉시 하직하고 돌아가 어머니를 찾아뵙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너를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깨물었다.〔思爾齧指〕”라고 하였다. 뒤에 공자가 이 일에 대하여 “증삼의 효성이 만리 밖까지 감응하였다.〔曾參之孝精感萬里〕”라고 하였다. 《說郛 卷117下》
[주D-010]저포(樗蒲)로 …… 갔네 : 저포는 저(樗)와 포(蒲)의 열매로 만든 일종의 주사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도박에 사용되었다. 유지(柳枝)는 기생을 일컫는 말이다. 이 구절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박과 기생을 벗 삼아 노년을 보냈다는 뜻으로 추정되나, 그와 관련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주D-011]두목(杜牧) : 당(唐)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목지(牧之)이고, 호는 번천(樊川)이다. 같은 만당(晩唐) 시기의 시인인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며, 시풍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도 칭해진다. 서정성이 뛰어난 시를 많이 지었고,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였는데, 시어의 조탁(彫琢) 못지않게 내용을 중시했다. 《번천문집(樊川文集)》이 전한다.
[주D-012]진등(陳登) : 위(魏)나라의 고사(高士)로, 자는 원룡(元龍)이다. 그가 죽은 뒤 유비(劉備)가 허사(許汜)와 함께 형주(荆州)에서 천하의 인물을 논하면서, “원룡 같은 문무(文武)와 담지(膽志)는 고인들 중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안타까워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이때 허사가 옛날 난리를 만나 진등을 찾아갔을 때 진등은 큰 침상에 올라가서 자면서 자신은 아래의 작은 침상에서 자게 하는 등 손님으로 예우하지 않았던 것을 불평하니, 유비가 “그대는 국사(國士)의 명망을 지니고도 집안을 잊고 나라 걱정에 몰두하지 않았으니, 그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와 얘기를 나누었겠는가. 나 같았으면 자신은 백척루(百尺樓) 위에 올라가 눕고, 그대는 맨땅에 눕게 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
[주D-013]초서(草書) 등잔 : 이기가 생전에 초서로 써 준 종이로 등롱(燈籠)을 바른 등잔을 말한다.
[주D-014]과혁(裹革)의 뜻 : 과혁은 가죽에 싼다는 뜻으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뒤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려고 했던 마음이란 뜻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 가지고 돌아와 장사 지내야 한다.”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실제로 마원이 죽은 뒤에 그 가족들은 모함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간소하게 장사를 지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D-015]하늘 근처 : 임금이 있는 대궐 또는 조정을 가리킨다.
[주C-001]해학(海鶴) : 조선 말기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계몽운동가인 이기(李沂, 1848~1909)의 호이다. 자는 백증(伯曾)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전북 김제(金堤)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시재(詩才)로 이름을 날렸으나, 과거에 수차례 낙방한 뒤로는 실학자들의 저술을 연구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문명을 목도하고 감명을 받아 단발하였다. 귀국 후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냈다. 1906년(광무10)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계몽활동을 하였으며, 을사오적의 처단을 위해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실행에 옮기려 하다가 체포되어 전라도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났다. 석방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호남학회(湖南學會)의 간부로서 계몽적 글들을 발표했다. 1909년(융희3)에는 단군교(檀君敎)를 창립하는 데 가담했고, 그해 7월 서울의 여사(旅舍)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주D-001]의류(依劉)한 …… 어려웠고 : 오랜 세월 세력가에게 의탁하였으나,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의류는 세력이나 명망이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권21 〈위서(魏書) 왕찬전(王粲傳)〉에, “황문 시랑(黃門侍郞)에 제수되었으나, 서경(西京)이 소란하였으므로, 마침내 나가지 않고 형주(荊州)로 가서 유표(劉表)에게 의탁하였으나, 유표는 그의 외모가 보잘것없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소홀히 대하고 중용하지 않았다.” 하였고, 당(唐)나라 시인 허혼(許渾)의 시에, “대궐에 조회하고자 하여 잠깐 유표에게 의탁한다.〔欲朝金闕暫依劉〕” 하였다. 《全唐詩 卷536》
[주D-002]매옥(買沃) : 옥주산(沃州山)을 매입하였다는 뜻으로, 은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때 고승인 축잠(竺潛)이 섬산(剡山)에 은거할 적에, 고승 지둔(支遁)이 옥주(沃洲)의 작은 고개를 매입하기를 청하였는데, 축잠이 “오고 싶다면 주기는 하겠으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산을 사서 은거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니, 지둔이 몹시 부끄러워했던 고사가 있다. 당나라 시인 유장경(劉長卿)의 〈송방외상인(送方外上人)〉 시에, “옥주산을 매입하지 말라. 당시 사람들은 이미 그곳에 있음을 안다네.〔莫買沃洲山 時人已知處〕” 하였다. 《會稽志 卷15》
[주D-003]채택(蔡澤) : 전국 시대 연(燕)나라 사람으로 변설에 능하였다. 조(趙)나라, 한(韓)나라, 위(魏)나라를 다니며 유세하였으나 모두 중용되지 못하다가, 진(秦)나라에 들어갔을 때 당시 재상인 범수(范睢)가 그를 알아보고 자신의 후임으로 소왕(昭王)에게 추천하여 객경(客卿), 승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史記 卷79 范睢蔡澤列傳》
[주D-004]송경(宋牼)이 …… 어쩌랴 : 채택을 추천해 준 범수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송경은 선진(先秦) 때의 사람으로, 송견(宋鈃) 또는 송영(宋榮)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와 진나라가 전쟁을 벌이려고 할 때, 그 싸움을 말리기 위해 초나라 제후를 찾아가던 길에 맹자(孟子)를 만났는데, 맹자는 그가 그 싸움이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가지고 설득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차라리 인의(仁義)를 가지고 설득하기를 권했던 고사가 있다. 《孟子 告子下》
[주D-005]닷 섬들이 빈 박 : 나름대로 훌륭한 용도가 있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물을 가리킨다. 혜자(惠子)가 어느 날 친구인 장자(莊子)에게, “위(魏)나라 왕이 보내 준 박 씨를 심었더니, 다섯 섬들이 박이 열렸네. 그렇지만 호리병처럼 쓰자니 물 무게를 지탱하기 어렵겠고,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자니 너무 넓어서 쓸 수가 없겠더군. 속이 텅 비고 크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 부수어 버렸네.”라고 하자, 장자가 사물의 특성을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한다고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자네에겐 다섯 섬들이 바가지가 있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큰 통으로 만들어 강호에 띄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것이 너무 커서 쓸데가 없다고 걱정만 하는가.” 하였다. 《莊子 逍遙遊》
[주D-006]의병 격문 : 이기가 1894년(고종31) 동학혁명(東學革命) 때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조정의 부패한 관료들을 제거하라고 격려하였으나, 농민군의 폐해가 심하게 나타나자 도리어 군중을 모아 그들을 토벌하는 선봉에 섰던 일이 있는데, 그때의 일을 지칭하는 듯하나 명확하지 않다. 참고로 1895년 안동부(安東府)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그는 그런 수구적인 방식의 의병 활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안동부 관찰사 이남규(李南珪)의 막료가 되어 모병과 군사 조련을 담당하여 의병 토벌에 큰 공을 세웠던 적이 있다.
[주D-007]흰머리 …… 기이했네 : 이기가 노년에 자진해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는 등의 기행을 한 것을 가리킨다. 매천의 이 시구에 대해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근래에 이기라는 자가 있어서 시문에 능하였는데, 아비가 죽었을 때 상복을 버리고 검은 옷을 입었으며, 연전에 학보(學報)에서는 사람들에게 독서하지 말 것을 권하면서 즐겨 유림(儒林)을 욕하였다. 이자야 진실로 나무랄 것이 못 되나, 마침내 어떤 문사(文士)가 그 사람에 대한 만사(輓詞)를 지으면서, ‘흰머리 단발하는 등, 늙을수록 기이했네.〔剃刀雪落老愈奇〕’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소롭다.”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艮齋集 後編 續 卷4 答孫周夏》
[주D-008]연제(燃臍) : 배꼽을 태우는 것으로, 원흉이 처벌받아 죽는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동탁(董卓)이 처벌받아 그 시신이 저자에 버려졌는데, 평소에 비만했던 터라 뜨거운 날씨로 인해 지방이 녹아 흥건히 흘러나왔다. 그 주위를 경계하던 아전이 동탁의 배꼽 위에 불을 붙이니, 여러 날 동안 환하게 타올랐다고 한다. 《後漢書 卷102 董卓列傳》
[주D-009]설지(囓指) : 손가락을 깨문다는 뜻으로, 부모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증삼이 한번은 공자를 따라 초나라에 가 있을 때 갑자기 마음이 섬뜩하여 즉시 하직하고 돌아가 어머니를 찾아뵙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너를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깨물었다.〔思爾齧指〕”라고 하였다. 뒤에 공자가 이 일에 대하여 “증삼의 효성이 만리 밖까지 감응하였다.〔曾參之孝精感萬里〕”라고 하였다. 《說郛 卷117下》
[주D-010]저포(樗蒲)로 …… 갔네 : 저포는 저(樗)와 포(蒲)의 열매로 만든 일종의 주사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도박에 사용되었다. 유지(柳枝)는 기생을 일컫는 말이다. 이 구절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박과 기생을 벗 삼아 노년을 보냈다는 뜻으로 추정되나, 그와 관련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주D-011]두목(杜牧) : 당(唐)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목지(牧之)이고, 호는 번천(樊川)이다. 같은 만당(晩唐) 시기의 시인인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며, 시풍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도 칭해진다. 서정성이 뛰어난 시를 많이 지었고,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였는데, 시어의 조탁(彫琢) 못지않게 내용을 중시했다. 《번천문집(樊川文集)》이 전한다.
[주D-012]진등(陳登) : 위(魏)나라의 고사(高士)로, 자는 원룡(元龍)이다. 그가 죽은 뒤 유비(劉備)가 허사(許汜)와 함께 형주(荆州)에서 천하의 인물을 논하면서, “원룡 같은 문무(文武)와 담지(膽志)는 고인들 중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안타까워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이때 허사가 옛날 난리를 만나 진등을 찾아갔을 때 진등은 큰 침상에 올라가서 자면서 자신은 아래의 작은 침상에서 자게 하는 등 손님으로 예우하지 않았던 것을 불평하니, 유비가 “그대는 국사(國士)의 명망을 지니고도 집안을 잊고 나라 걱정에 몰두하지 않았으니, 그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와 얘기를 나누었겠는가. 나 같았으면 자신은 백척루(百尺樓) 위에 올라가 눕고, 그대는 맨땅에 눕게 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
[주D-013]초서(草書) 등잔 : 이기가 생전에 초서로 써 준 종이로 등롱(燈籠)을 바른 등잔을 말한다.
[주D-014]과혁(裹革)의 뜻 : 과혁은 가죽에 싼다는 뜻으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뒤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려고 했던 마음이란 뜻이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 가지고 돌아와 장사 지내야 한다.”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실제로 마원이 죽은 뒤에 그 가족들은 모함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하고 간소하게 장사를 지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D-015]하늘 근처 : 임금이 있는 대궐 또는 조정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권경열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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