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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부여 소견 , 남도일보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칼럼‘부여’ 소견

오치남 기자  |  ocn@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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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2  17: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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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소견

부여를 다시 방문했다. 46년 만이다. 낙화암부터 갔다. 부소산성을 걸으면서 흥얼거린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강산이 네 번이나 변했으니 낙화암 가는 길이 새삼스럽다. 매표소 입구에서 2∼3분 걸으니 삼충사(三忠祠)가 있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과 흥수, 계백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660년, 황산벌 전투, 신라군 5만과 백제 5천 결사대, 화랑 관창,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 의자왕과 삼천궁녀, 나당연합군과 소정방, 백제부흥운동. 길을 걸으면서 이런 단어들이 스쳐간다.

영일루, 군창지, 반월루, 사자루를 지나니 낙화암이다. 서기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망하자 ‘남의 손에 더렵혀지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하고 궁녀 3천여명이 이 바위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내렸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巖·떨어져서 죽은 바위)으로 적혀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궁녀들이 꽃이 날리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落花巖)’이라 했다.

백화정(百花亭)에 올랐다. 1929년에 군수 홍한표가 낙화암 정상에 지었다. 여기에서 백마강(白馬江)을 내려다보니 백마강은 말이 없다. 슬픈 역사를 그 누가 알까? 낙화암 천년송이 알까?
고란사(皐蘭寺)로 발길을 옮기면서 낙화암 표시석 뒷면을 보니, 춘원 이광수(1892-1950)의 낙화암 시가 새겨져 있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 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사자수: 백마강, 사비강, 백강, 백촌강으로 불림

춘원 이광수. 만감이 교차한다. 한국 문학사의 선구자인 동시에 민족 반역자. 친일파로 변절하여 조선 청년들에게 학도병으로 가라고 외쳐대었으니, 그가 남긴 <무정> · <유정> · <단종애사>같은 문학이 빛바래고 말았다. 속담에 ‘사람을 보려면 그 후반을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조지훈의 글 <지조론> 한 대목이 생각난다. 1960년 3월 이승만 정권시절에 ‘새벽’ 잡지에 쓴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명문이다.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 말의 대일 협력은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은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고란사 내려가는 길에는 불경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나에게는 ‘꿈꾸는 백마강’ 노래 가사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오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아라.’
아쉽게도 고란사 선착장에 정박되어 있는 황포돛대를 타지 못했다. 강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문화재청 공무원들에게 ‘역사에서 본 청백리 이야기’ 강의를 마치고 부여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 이왕 왔으니 부여를 좀 더 구경하기로 했다.
국립부여박물관 가는 길에 신동엽 생가와 문학관이 있다. MC 신동엽과 이름이 같아 별 생각 없이 들어갔다. 그랬더니 ‘껍데기는 가라’를 쓴 신동엽(1930∼1969)이 부여출신이었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중략)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민족시인 신동엽은 장편 서사시 <금강>도 남겼다. 동학농민혁명의 한을 노래했다.
국립부여 박물관에서 ‘백제금동대향로’를 보았다. 사비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백제와 왜의 교류 비디오도 보았다. 백제 문화는 왜에 영향이 컸다. 일본에서는 구다라(백제) 물건이 명품이었다. 오죽했으면 ‘구다라 나이(百濟無ぃ 백제가 아니다)’란 말이 나왔을까.
<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