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애일기(陰崖日記) |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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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 홍문관 청 환삭 유자광 익대훈록 소(癸酉弘文館請還削柳子光翊戴勳錄疏) |
계유년에 홍문관에서 유자광(柳子光)의 익대훈록(翊戴勳錄)을 도로 삭제하기를 청하는 소(疏)
좌상(左相)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충후(忠厚)한 풍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오니, 유자광의 익대(翊戴)한 공은 고금에 없는 바이온즉 그 죄로 해서 훈록(勳錄)을 삭제할 수는 없나이다.” 하니,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해서 도로 기록했습니다.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서로 글을 올려 자광(子光)의 죄를 들어 의논하기를, “서자(庶子)의 몸으로 세상에 연고가 많은 것을 인해서 그 간사스러운 지혜를 써서 위험한 데로 기울이고 일을 좋아하여 착한 사람들을 없애고서 중흥(中興)할 때에 다시 훈신(勳臣)의 반열에 참여하더니, 또 다시 위험한 데로 빠뜨리는 습관으로 맑은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히다가 바닷가에 내쫓겼습니다. 죽기 몇 해 전에 두 눈이 모두 멀었고, 그가 죽어서 장사지낼 때에는 아들 진(軫)은 초상에 나가지도 않았으며, 아들 방(房)은 장사지내는 데 가지 않더니 스스로 멸망함을 당했습니다. 진(軫)은 늙은 어미를 구박해 내쫓고, 아우 방(房)을 핍박해서 죽였사오니 밝고 밝은 하늘을 어찌 속일 수 있으리까.
○ 신 등이 유자광의 일로써 연일 소를 올려 여러 번 전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반복해 생각하옵건대, 일은 반드시 다투는 데 있사오니 마침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나이다. 전(傳)에 말하기를, ‘백성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의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여야 비로소 백성의 부모라.’ 했습니다. 대체 임금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신하들이 나가는 길이 모두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 일시의 견마(犬馬)의 공으로 천지에 용납하기 어려운 죄를 가려서 공과 이익을 급하게 여기고 대의를 잊어버리며, 하늘이 토벌하는 것을 구경하고 간사한 적을 상주면 누가 전하더러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오리까. 설혹 한 사람이 공이 있어 상줄 만하고 죄가 있어 벌줄 만하면, 마땅히 그 공과 죄의 경중을 참작해서 처리할 것이지, 어찌 아침에는 벌을 주고 저녁에는 상을 주며, 살아서는 위엄을 보이고 죽어서는 은혜를 베푼단 말입니까. 이제 대신들이 외람되이 임금의 사랑과 발탁함을 입었으나, 정사를 밝게 일으킴이 없이 오직 자광(子光)의 공을 도로 기록하자는 것을 청하는데, 전하께서는 들으시고 옳게 여겨 대신들과 의논하시고 함께 쏠리셨는데, 전하께서는 문득 조정이 시비의 분별없이 함부로 남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생각하시어 편벽되이 먼저 한 말을 주장하시어 대간과 시종이 소를 올려 명을 청해도 완강히 거절하시고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대체 임금과 정승이 말을 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면 사람들이 감히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는 수도 있사온데, 국가에 큰 근심이 있고 이제 전하의 밝고 성(聖)스러움으로 유독 이 일에 대해서는 거꾸로 하고 잘못하심이 이와 같으십니까. 자광(子光)이 죽을 때에 두 눈이 모두 멀었고 죽은 뒤에는 여러 아들끼리 서로 죽여서 문호(門戶)를 멸망시켰사오니 이는 천리(天理) 아님이 없나이다. 하늘이 옳지 못한 자에게 보답함인데, 전하께서는 반드시 하늘을 어기고 이치를 거슬려 정직하지 않은 은혜를 베푸시려 하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이 삼가 옛 역사를 보건대,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 없던 시대가 없사오나, 임금이 그 악함을 아는 이가 적사옵고, 간혹 아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배척해 내보내는 데 지나지 않았고, 배척한 뒤에는 오히려 사랑하고 능히 잊지 못하는 것이 있사와 비록 딴 세상에 있어서도 자기도 모르게 분통해 할 것입니다. 하물며 자광(子光)은 눈이 멀어 보지 못했으나 이제 그 남은 화도 아직 다 끊어 없애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이미 그 악함을 아시면서도 어찌 살펴 처리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이미 삭제한 공을 추록(追錄)하려 하시나이까. 신등은 뒷사람들이 지금의 처사를 분해하는 것이 역시 지금 사람들이 옛 처사를 분히 여기는 것과 같을 것을 두려워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급히 명령하신 것을 거두시어 여러 사람의 뜻을 쾌하게 하시오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교리(校理) 신모(臣某)의 지은 바로서 승낙하심을 받았다.
○ 조공(趙公) 효직(孝直)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죽으니 아, 사람이 죽었다는데, 어찌 말할 것이 없겠는가. 공(公)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어려서부터 강개(慷慨)하고 큰 뜻이 있었으며,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해서 계속해서 높은 과거에 장원하고 높은 벼슬을 역임했는데 무릇 하는 일이 남을 흔들지 않고 도리에서 떠나지 않으니, 선비들이 모두 추대하여 소중히 여겼다. 국가의 중흥(中興)하는 운수를 당해서 조야(朝野)가 그 새로운 정치를 바랐기 때문에 공은 홀로 정중하게 일을 건의해서 선왕(先王)의 법도를 회복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이에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한 것은 좇지 않으신 것이 없어, 스스로 생각하기에 세상에 드문 임금을 만났다 하여 교화하는 조목을 닦아 밝혀서 거의 경장(更張)하게 되자, 임금의 사랑하심이 날로 높아 차서를 뛰어올려 쓰시어 특별히 공에게 대사헌(大司憲)을 제수하시와 무리의 바라는 바에 맞게 하고, 기강(紀綱)을 잡아 영(令)이 행하고 그칠 것을 금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온 모든 어진 이들이 나이는 어리고 기운이 날카로워, 일을 개혁하는 데 점차로 하지 않고 험하고 막힌 데를 거슬려 물정(物情)이 크게 무너지자, 공은 신대용(申大用 신상(申鏛))ㆍ권중허(權仲虛 권발(權撥))로 더불어 두 사이를 조절해서 패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하려 했으나, 신구(新舊)가 이간질해서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사람의 계획이 잘못된 것이겠는가. 아, 옳고 그른 것은 비록 한때에 뒤섞였지만 정상은 반드시 후일에 드러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말하여야 할까.
[주C-001] : 예종(睿宗) 때에 남이(南怡)가 병조 판서로 귀하게 된 것을 시기한 유자광(柳子光)이 남이의 젊어서 지은 시에 “남아 이십 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란 구절에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쳐서 고발하여 역적으로 죽게 하였는데, 그것을 익대훈(翊戴勳)이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민수 (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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