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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겸 효자인 송흠

청백리 송흠 (1) , 김세곤 글 <청백리 송흠> 저자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백리 송흠> 저자)

1. 시작하면서

  송흠(宋欽 1459-1547)은 조선 중종 때 명신 名臣이다. 일곱 번이나 청백리에 뽑혔고, 최부와 함께 호남선비 1세대이며, 송순과 양팽손 ․ 안처함의 스승이다.

 역사기록은 정사 正史와 야사 野史 모두를 살펴보아야 한다. 정사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고 담백하며 강자의 논리에 치중한데 반하여, 야사는 흥미위주이고 정사가 담지 못하는 구전도 기록하며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 정사는 <조선왕조실록>이고 야사는 <연려실 기술>이다.

그러면 송흠에 관한 역사 기록을 살펴보자. 먼저 1544년 3월22일자 조선왕조실록이다.  

  《전라도 관찰사가 영광군에 순찰 가서 판중추를 위해 기영정에서 잔치를 베풀다》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宋麟壽)가 영광군(靈光郡)에 순찰 나가, 판중추(判中樞) 송흠(宋欽)을 위해 기영정(耆英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중략)

사신 史臣은 논한다. 송흠은 이 고을 사람이고 정자는 곧 송인수가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이어받아 세운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어 영광스럽게 해 준 것이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榮達)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군(乞郡)하여 10여 고을의 원을 지냈고 벼슬이 또한 높았었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육경(六卿)에서 은퇴하여 늙어간 사람으로는 근고(近古)에 오직 이 한 사람 뿐이었는데,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 관수정(觀水亭)이란 편액(扁額)를 걸고 날마다 한가로이 만족하게 지내기를 일삼았으므로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나 존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집에 있을 적이면 종일토록 의관(衣冠)을 반듯하게 하고 조금도 몸을 기울이지 않고서 오직 서책(書冊)만을 대하였고, 고을 안의 후진(後進)을 접할 때에는 비록 나이가 젊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당(堂)에서 내려가 예절을 다했었다. 그의 어머니도 가법(家法)이 또한 엄격하여 감히 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고 나이가 1백 살이었다. 송흠 또한 나이 90이 가까운데도 기력(氣力)이 오히려 정정하였다. 특별히 조정에서 숭품(崇品)을 총애하는 은전을 입게 되었으므로 논하는 사람들이 인자한 덕의 효과라고 했었다. 도내(道內)에서 재상(宰相)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朴守良)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다음은 이긍익(1736-1806)이 쓴 <연려실기술>이다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송흠(宋欽),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 (知止堂)이요,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기묘년에 태어나서 경자년에 사마시에 뽑혔고,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 기사 耆社 (늙은 정승들의 모임)에 들고 청백리로 뽑혔다.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고 나이 90세에 죽었다.

청백하고 검소하고 벼슬에 욕심이 없음이 조원기(趙元紀)와 같았고, 여러 번 1품 품계에 올랐다. 공이 매양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 신영(新迎)하는 말(馬)이 겨우 세 필 밖에 안 되었다. 공이 타는 말이 한 필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 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여산 군수(礪山郡守)가 되었을 때, 고을이 큰 길 옆이어서 손님은 많은데 대접할 것이 없어,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호산춘(壺山春)’이라 했다. <행장>

이 두 사료 史料를 읽어 보면 송흠이 청백리 淸白吏이고 효자임이 분명하다. 청백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청백 淸白은 ‘청렴결백’하다는 말의 약칭으로 이는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음양오행설에 의하면 청 靑은 오행 가운데 나무 木으로써 동쪽에 해당하고,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으로 창조, 생명, 신생을 상징하며, 유학의 덕목 중 인 仁을 의미한다. 서울의 4대문 중 동대문의 별칭은 흥인지문으로서 동쪽에 인을 일치시키고 있다.

한편 백 白은 오행 가운데 금 金으로 서쪽에 해당하고, 결백과 진실, 삶, 순결 등을 뜻하며 의 義를 의미한다. 서대문의 별칭은 ‘의를 돈독히 하는 문’이라는 의미의 돈의문 敦義門이다.

그런데 청백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그냥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의 仁義가 넘치어야 청백리이다. 백성을 내 처자같이 사랑하고, 나랏일을 정의롭고 공정하게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도록 하는 관료야 말로 청백리이다. 이런 청백리의 전형이 바로 송흠이다.

( 연재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