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당 송흠은 그냥 청백리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것처럼 삼마태수로서의 청렴성과 호산춘 술을 제조하여 예산
을 절약하는 정신, 그리고 그의 시호가 효헌공 孝憲公(효의 근본, 으뜸)이듯이 77살의 나이에도 99세의 어머니를 모신 효행은 널리 본받아야 할
사표師表이다.
그런데 필자가 정말 감동한 것은 송흠은 86세의 나이에 왜구와 중국 해적의 해안침범이 잦자 수군의 역량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한 점이
다. 한 때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보성군수·장흥부사 등 해안 지역의 수장을 한 경륜을 편 것이다.
그는 중국의 당선唐船처럼 판옥선을 제조할 것, 무기와 화포 등을 개량할 것, 우수한 장군과 용감한 수군을 정예화 할 것 등 수군개혁론을 중종
임금에게 건의한다.
그리하여 송흠이 별세한 8년 후인 1555년에 판옥선이 만들어졌고, 그로부터 37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만약 판옥선이 없었다면 조선수군은 어찌되었을까. 충무공 이순신의 23전 23승이 가능했을까.
- 저자 후기에서 -
의리義理와 학문을 숭상하던 전라도 땅에서는 의리에 뛰어나고 학문에 밝았던 위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유학儒學에서의 의리정신義理精神은
중심적인 사상인데, 조선 초기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정하고 숭유崇儒정책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조선왕조는 의리와 성리학을 유학의 요체로
여기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국가의 중추적 위인으로 대접받는 사회로 발전하였다.
송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너무나 찬란하다.“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기고 벼슬살이는 청백하게 하여 지위는 고관에 이르고 나이는 90세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명재 윤증)라고 칭송하였고, 임금의 치제문에서도 “자신을 처함에 굽힘이 없었고 학술이 넉넉했노라”라고 평하여 의리로 살았고
높은 학문 수준에 이르렀음을 밝혀주고 있다. 전라도 유학정신의 특징인 의리정신에 투철하였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평가를 받았었다.
송흠의 유적지는 찬란하다. 호남 누정문화의 발상지인 관수정觀水亭이 아직도 우뚝 서있고, 당대의 문인 학자들의 시와 글이 정자의 현판에는
가득하다.
이런 위인의 사적을 책으로 읽게 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가. 많은 분들이 이 뛰어난 청백리이자 위인인 송흠의 일생을 널리 읽도록 추천해 마지
않는다.
박 석 무 朴 錫 武 다산연구소이사장·단국대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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