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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오날이 오날이소서 노래탑, 남원 만인의총, 김세곤 글

제26회 일본에 끌려간 남원 도공들 - “오나리 오나리쇼셔” 노래 탑에서
입력시간 : 2013. 07.04. 00:00



"매일 무사히 지내게 해주소서” 망향의 恨 달래

삶에 대한 감사와 기쁨 그리고 염원 담겨

끌려간 조선도공 후예에 의해 400년 전수

민족 정체성과 자긍심 지키는 모습 감동

남원 만인의총에는 특이한 탑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오나리 오나리쇼셔’ 노래 탑이다. 이 탑의 앞면 가운데쯤에는 노래 가사 같은 것이 적혀 있다.



오나리 오나리쇼셔

매일에 오나리쇼셔

졈그디도 새디도 마라시고

새라난 나난

매양 댱식에 오나리쇼셔



글이 조선시대 언문으로 되어 있어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래서 요즘 말로 바꾸어 읽는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에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날이) 새거들랑, 샐지라도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냈습니다. 하루하루가 오늘 같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오늘같이 무사히 지내게 하여 주소서.”



이 노래 가사에는 삶에 대한 감사와 기쁨 그리고 염원이 담겨있다.

이어서 탑의 뒷면을 살펴본다. 여기에는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 탑을 건립하면서” 라는 글이 적혀 있다. 1995년 5월에 노래 탑을 준공하면서 남원문화원이 작성한 글이다. 글을 자세히 읽어 본다.

남원에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싸움에서 희생당한 만인의 무덤이 치욕의 역사 상징물로 남아 우리에게 보여준 교훈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또한 그 의미가 크다.

당시 남원성 전투의 처절했던 상황은 만인의총에서 뿐만 아니라 전공의 상징으로 일본 곳곳에 코 무덤과 귀 무덤이 세워져 있고, 조선 사람들을 납치하여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고 남원지역에서 수많은 도공을 강제로 끌고 가서 오늘 일본 도자가가 있게 한 것은 우리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 때 끌려갔던 도공들이 가고시마현 히가시이치기초(東市來町) 미야마(美山)에 정착하여 망향의 한을 달래면서 부르던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지금도 매년 9월14일(음력 8월15일 : 필자 주)이 되면 이곳 옥산궁에서 제사를 행할 때 신무가 (神舞歌)로 부르고 있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는 조선조까지 우리 조상들이 부르던 노래였으나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잊혀졌다. 다행히도 1610년 당시 남원에 살았던 장악원 악사인 양덕수가 채보하여 자신의 저서 양금신보(梁琴新譜)에 실어 놓았는데 양금신보는 임진왜란 이후 한국 음악사 연구에서 중요한 음악 자료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민간인에게는 잊혀져 버린 노래이지만 남원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후예에 의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러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 이 탑을 세우면서 오늘 우리는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고 오늘에 안주하지 않으며 이 탑에 새겨진 노래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 우리 향토문화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1995년 4월30일 남원문화원



정유재란 이후 조선에서는 사라진 “오늘이 오늘이소서”란 노래가 이역만리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에 의해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다니 정말 눈물겹다.

이 노래가 전해져 내려온 곳은 일본 큐슈(九州) 남쪽에 있는 사쓰마(오늘날의 가고시마현)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 : 오늘날의 미야마)이다. 남원에서 끌려간 도공들은 대대로 이곳에 거주하였다.

원래 사쓰마 번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의 영지로서 그는 남원성 전투에 참가한 왜군 장수이며 일본 다도의 시조인 센노리큐(1522-1591)의 제자로서 조선 사발을 엄청 좋아했다.

센노리큐는 와비차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와비는 오만하게 굴지 않는 언행을 말하는데 센노리큐는 다다미 2장 크기의 다실을 만들어 다도를 실천하였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다도 선생이었는데 노부나가가 죽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인연을 쌓았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호화판으로 다실을 꾸미자 두 사람은 사이가 벌어졌고, 1591년 2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할복하라는 명령을 받고 할복자살 하였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시마즈는 도공들을 끌고 갔다. 그는 1598년 11월 노량해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심당길, 박평의, 김해 등 80여명의 조선 사기장이들을 납치하여 갔다. 조선 도공들은 1598년 12월에 구시키노(串木野)의 시마바라(島平) 해변 등 네 곳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시마즈는 조선인들을 여기에 버려두고 떠나 버렸다. 이즈음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세키가하라 전투의 여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반 이에야스파인 이시타군에 속해있던 시마즈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자 이에야스의 사쓰마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조선의 도공들은 내팽개쳐졌다. 조선인들은 스스로 황무지에 밭을 일구고 오두막을 세웠다. 그 다음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자기를 구워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구시키노의 농민들이 박해를 하였다. 냉대와 차별을 한 것이다.

별수 없이 조선 포로들은 시마바라를 등지고 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 나에시로가와로 이주하였다.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한지 2년 쯤 되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대의 침략위험이 없어지자 시마즈는 조선 사람들을 찾았다. 전란으로 까맣게 잊었던 조선인 도공들을 기억해 낸 것이다.

시마즈는 그들에게 뛰어난 도자기 기술이 있다는 것을 듣고 그들에게 대지 24곳과 곡식 78석을 주고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또한 그들의 중심인물인 박평의를 촌장에 임명하고, 관용 官用으로 쓸 도자기를 만드는 것 외에 매년 술병 50개를 상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인들은 도자기에 전념하면서 유명한 사쓰마 야키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야끼는 도자기를 굽는다는 뜻이나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불린다.

에도시대 후기인 1780년에 다치바나 난케에라는 한의사는 자신의 기행문 <서유기>에서 나에시로가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쓰마의 가고시마 성으로부터 7리 서쪽의 나에시로가와라는 곳은 한 마을 전체가 조선인이다. 옛날에 다이묘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 시 이 지방의 영주가 한 마을의 남녀노소를 포로로 잡아 데려왔다.

그는 이들 조선인 포로들에게 사쓰마 한 마을의 토지를 내려주어 영구히 이 마을에서 살게 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자손대대로 조선의 풍속을 따르니 의복에서 언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선식이며 해마다 번창하여 수백 가구에 이른다.

처음 납치된 당시 성씨는 17개 성 姓으로 신, 이, 박, 변, 임, 정, 차, 강, 진, 최, 노, 심, 김, 백, 정, 하, 주이다.

한편 조선 도공들은 나에시로가와로 이주하면서부터 스스로 옥산궁(玉山宮)을 세우고 이곳에 단군을 모셨는데 그 예배 대상은 커다란 바위였다고 한다. 옥산궁은 마치 서낭당과 같은 형식이었다. 조선인들은 매년 8월 추석이면 떡을 만들고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옥산궁에 제사를 지냈고, 도자기를 빚어 가마에 넣고 불을 지필 때에도 제를 올리곤 하였다. 제문은 당연히 조선말 이었다.

전쟁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옥산궁을 짓고 거기에 단군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대견한 일이다. 더구나 단군을 모시었다는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책을 읽고 정신이 바로선 지식인들이 포로 중에 있었다는 것이고 이들이 조선인의 자긍심을 지켜냈다고 할 수 있다.

1867년에 쓴 일본 기록 <옥산궁 유래기>에도 ‘옥산궁은 조선 개조 단군의 묘’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조선인 도공들의 조국애가 일본인들에게 전해질 만큼 당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 옥산궁은 옥산신사로 개칭되었다. 일본에 불어 닥친 국수주의 영향으로 옥산궁은 사당에서 신사로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는 옥산신사에서 "학구무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무가 巫歌는 무당들이 부르는 노래 형식이다. 또한 사제 司祭가 추는 춤의 형태는 지금 우리나라 진주지방에서 추는 검무와 아주 흡사하다.

한편 옥산신사에서 쓰는 제기를 보면 장고가 있는데 길이만 짧아졌을 뿐 모양은 우리 것과 같으며 시루떡을 찌는 작은 시루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다.

이역 땅 일본에서도 민족의 정체성 正體性과 자긍심을 지키려는 조선의 도공들. 정말 눈물겹다. 너무 자랑스럽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사진 : 1. 오늘이 오늘이소서 탑 전면

2. 오늘이 오늘이소서 탑 후면

3. 남원 만인의총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