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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23.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 - 팔충신 사적비에서 , 김세곤글

호남정신 뿌리를찾아-23.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 - 팔충신 사적비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순절한 8명의 대표 의인들
정기원·이복남·임현·김경로·신호·이덕회·이원춘·오흥업
도망가자는 명군 장수 회유에도 나라에 기꺼이 목숨 바쳐
입력시간 : 2013. 05.15. 00:00



팔충신 사적비

이제 만인의총 기념관을 나와서 충렬사로 향한다. 외삼문인 충의문으로 가는 길에 팔충신 사적비가 있다. 이 비는 1872년에 세운 것으로 남원부사 이병석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에는 “1612년에 성안 동쪽에 사우를 세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접반사 정기원, 전라병사 이복남, 남원부사 임현, 전라방어사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남원부 판관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등 7충신과 따로 손공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사 지내었다. 1653년에 효종 임금이 사액하였고 1675년에 성안 서북쪽으로 이전하였으며 1836년에 사헌부 지평 오흥업을 추배하여 팔충신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남원부성 순절 만인지위 위패



그러면 팔충신에 대하여 알아보자.

접반사 정기원은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고 1589년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594년 의주 행재소에 복명한 뒤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 해 가을에 안악현감에 제수되고, 이후 사간원 사간·승정원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심유경이 강화회담을 그르치고 왜군이 다시 침입해 올 움직임이 있음을 알렸다.

그는 정유재란 때 예조참판으로 명나라 총병 양원의 접반사가 되어 남원에 들어갔다. 양원은 왜군이 총공격을 하자 이기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정기원에게 피신을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서숙(庶叔) 기생(己生)을 통하여 “저는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는 비장한 편지를 아버지에게 올린 뒤 왜군과 싸우다가 여러 장수와 함께 전사하였다. 그 때 나이 38세였다.

이복남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에 나주판관이 되고 1593년에 전라방어사·충청 조방장, 1594년 남원부사·전라병사, 1595년에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1월에 그는 다시 전라병사가 되었는데 남원이 위험하자 군사 1천명을 이끌고 입성하였다. 그는 왜군과 결사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구례현감 이원춘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임현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다.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서 출발하여 병조정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도사가 되어 춘천에서 왜군 400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세워 회양부사로 승진하였다. 1594년에 길주부사를 거쳐 함경도병사를 지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이 호남에 침입하자 그는 남원부사가 되어 내려갔다. 이 때 명나라 장수 양원과 함께 성을 수비하였는데 양원은 도중에 도망하고 홀로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충렬사



김경로는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맡았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 조방장으로 금산의 적을 쳤다. 이어서 급히 행재소로 달려가니 선조가 가상히 여겨 황해도 방어사로 임명하였다. 정유재란 때 그는 전주의 방어를 맡고 있다가 남원을 구하려고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진군하는 도중 순창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만나 함께 남원성에 들어갔다. 남원성이 함락되자 전라병사 이복남과 같이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이덕회는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왜군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을 맡았다가 특명으로 홍양통판에 올랐다. 1597년에 남원판관이 되었는데 남원이 왜군에 의해 포위되자 총병 양원, 남원부사 임현 등과 함께 남원을 수비하고 적을 기습하여 무기고를 불사르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세가 위급해지자 양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으나, 이덕회는 병사 이복남, 부사 임현 등 50여 명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신호는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조산만호가 되었으며, 그 뒤 낙안군수를 지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 등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좌부장으로서 활약하여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교룡산성 수어별장이 되어 북문을 지키면서 성 안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활로 쏘아 죽였다. 화살이 떨어지자 칼로 맞서다가 중상을 입었는데,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했다.

구례현감 이원춘은 만인의총 기념관의 ‘8월16일 아군의 최후 전투상황’ 기록화에 나온 인물이다. 그림의 해설을 읽어보자.

그는 흑각별장궁 활을 휘어서 십발개중으로 적을 쏘아 죽였고, 죽은 시체를 뛰어 넘어 큰 칼을 휘두르면서 싸웠다. 부하들도 일시에 무기를 있는 대로 다 쓰고 왜적과 장렬하게 싸웠다. 나이 어린 손공생도 인궤를 허리에 졸라매고 끝까지 간직하고 구례현감의 뒤를 따라 최후일각까지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이원춘은 1584년에 북방의 권관으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정철의 명령으로 구례현감으로서 운봉현감 남간과 함께 전라좌도의 관병 5,000여 명을 거느리고 영남의병장 정인홍, 호남의병장 최경회 등과 함께 성주를 협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구례는 왜적이 영남으로부터 양호(兩湖)로 들어가는 요충지이므로 그는 조방장에 임명되어 구례를 잘 지켰다. 1597년 왜적이 다시 침범하여 남원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붓자 이원춘은 남원으로 달려가 남원성을 지켰다. 그러나 남원성이 함락되자 최후까지 싸우다가 이복남과 함께 전사하였다.

오흥업은 남원사람으로 군량보급 업무를 맡았다. 남원성이 함락되자 이복남, 오응정과 합세하여 분전하다가 화약고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아우 오윤업도 같은 날 죽었다. 오윤업은 남원성이 포위당하자 백의로서 칼을 뽑아 크게 외치면서 말을 달려 포위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왜적이 이를 장하게 여겨 진을 열어 주었다. 그는 무너지고 있는 성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형 흥업과 함께 죽었다

만인의총



이제 충렬사로 발길을 옮긴다. 충의문, 성인문을 지나니 충렬사가 있다. 사당 편액은 한글로 되어 있다.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단다.

먼저 사당 앞에서 향을 피우고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1만여 의사들에게 묵념을 하였다. 순절하신 분들에게 삼가 경의를 드리었다.

사당 안을 살펴보았다. 가운데에 '남원부성 순절 만인지위 南原府城殉節萬人之位' 라는 신위가 있고 좌우에 수많은 위패함이 모시어져 있다.

자세히 보니 위패함에는 의사들의 직함이 적혀 있는데 멀리서 보니 글씨가 잘 안 보인다.

전라북도 만인의총관리사업소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의사들의 명단을 찾았다. 여기에 모시어진 위패는 모두 52분이다. 이들은 팔충신 외에 박계성, 문기방, 강덕복, 태귀생·태천생·태우·태시경·태색 일가, 오응정(吳應鼎)·오욱·오동량 부자, 이용제, 오응정(吳應井), 마응방, 황대중, 오윤업, 정민득, 형련, 양대박, 조익겸, 박기화, 손공생, 이해, 김나복, 김렴, 김부, 김수연, 김응배, 김충남, 문명회, 박은종, 서정수, 송상장, 송진부, 승국한, 전응협, 윤의, 이평형, 임혼, 이춘풍, 조언호, 임박, 최준·최보의 부자이다.

이어서 사당 뒤에 있는 만인의총으로 향한다. 여기에는 만인의총과 비석 그리고 안내문이 있다.

만인의총은 원래 남원역 앞에 있었는데 1964년 5월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안내문에는 1597년 8월 16일 성의 일각이 무너지자 이를 본 백성들이 돌멩이, 죽창, 괭이 등을 무기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천추의 한을 품고 옥쇄하였으니 그 수가 만 여 명에 헤아렸다고 적혀 있다.

이런 의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

의로운 이들이여, 고이고이 잠드소서!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