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장성의병, 직산전투에서 패한 왜군을 안성에서 무찌르다. |
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부: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
입력시간 : 2014. 01.08. 00:00 |
김신남·김성진 등이 의명 이끌고 왜적 32명 목 베어
포로 된 조선 남녀 17명도 구출
북이면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
임란 7년 전쟁 중 3차 걸쳐 의거
16개 고을 의사·의승 72명 적혀
1597년 8월16일에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곧장 전주로 향하였다.
전주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은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접하자 아예 도망 가버렸다. 이보다 앞서 7월25일에 선조의 임명장을 받고 갓 부임한 전라도관찰사 황신도 전주 감영에서 부안군 변산으로 피신하였다. 한 도의 주장 主將으로서 마땅히 힘을 다해야 할 전라감사가 이러했으니 전라도가 온전히 지켜질 수 있었을까?
8월27일자 선조실록에는 ‘비변사가 도망치기에 바쁜 관리들을 단속하고 영구히 등용하지 말자‘고 기록되어 있다. 9월5일자에는 ‘비변사가 전라감사에게 본도로 돌아와 복무하도록 지시’한 기록이 있다.
8월18일에 왜장 소서행장의 좌군은 전주에 무혈입성 하였다.
8월25일에는 가등청정이 이끄는 우군도 전주에 들어왔다.
전주에서 왜군 11만 명을 이끄는 장수들은 회의를 하였다.
왜군 좌군은 남으로 내려가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하여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하였다.
가등청정이 이끄는 왜군 우군은 9월3일에 공주를 점령하고 천안으로 진군하였다. 모리휘원과 흑전장정의 군대는 이미 전의, 진천에 이르렀다.
이러하자 서울의 조정은 다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선조는 황해도 해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고 내전과 왕자들은 먼저 수안 遂安으로 피난을 보냈다.
이어서 선조는 연거푸 사신을 보내 평양에 주둔해 있는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명군의 출동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명나라 경리 양호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는지 부총병 해생에게 가장 날쌔고 용맹한 군사 8천명을 주어 전투에 임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군대는 참장 양등산과 유격장 우백영, 파귀 등 맹장 15명이 지휘하고 있어 군인들의 사기가 높았다.
이들은 9월 6일 야음을 틈 타 은밀하게 천안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뒤이어 맹장 파새가 정병 2천명을 이끌고 증원군으로 떠났다.
9월 7일 동틀 무렵에 명군은 소사 금오평 金烏坪에 도착하여 군사를 세 패로 나누어서 좌우로 왜군을 덮칠 계획을 세웠다.
이 때 왜적은 이미 공주·천안으로부터 바로 서울로 향하고 있었는데 서울과는 불과 150리 였다. 이들 중 흑전장정 부대는 벌써 금오평에 이르렀다.
왜군이 전투준비를 하기도 전에 명나라 군사는 세 갈래 길에서 왜군을 공격하였다. 연달아 대포를 쏘고 쇠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서 돌진하니 왜군은 혼비백산하였다. 명군은 기세를 타고 왜적을 마구 무찔렀다.
이 날 명군과 왜군은 6차례나 맞붙어 싸웠다. 결과는 왜군의 패배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양군은 모두 휴식을 취하였다. 밤에 왜장 가등청정은 여러 장수들에게 내일 아침에는 결사적으로 싸우도록 명령하였다. 명나라 장수 해생은 비밀리 장수들에게 명령하기를, “오늘 왜적의 형세를 보니 적은 내일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니 죽음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라. 이 군율을 어기지 말라. 그리고 저 왜적은 교활하니 패하여 물러가게 되면 반드시 산길로 갈 것이다. 험한 곳에서는 명나라의 기병과 왜군의 보병은 형세가 다르니 끝까지 추적하지는 말라.” 하였다.
다음날 먼동이 틀 때 왜군은 일제히 포를 쏘며 학익진 鶴翼陣으로 진군하여 오는데, 흰 칼날을 휘두르고 살기 殺氣가 하늘까지 뻗쳐 명군의 눈을 아찔하게 하였다. 이러함에도 명나라 기병들은 왜군에 맞서서 갑자기 내달으며 철퇴를 휘둘러 치니 왜군은 모두 줄줄이 쪼개지듯 하였다.
더구나 유격장 파귀가 거느린 2천명의 지원군까지 가세하여 싸우니 얼마 안 되어 왜군은 패하여 목천·청주 쪽으로 달아났다.
명군은 끝까지 추격하지 말라는 해생의 명령도 있었고, 힘도 다하여 더 이상 왜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전투를 직산의 소사평 素沙坪 전투라 한다. 이 직산전투는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중 육전 陸戰 3대첩으로 손꼽힌다. 이리하여 왜군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고 만다.
전쟁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한편 김신남·김성진 등이 이끄는 장성의병 600여명은 후퇴하는 왜적을 안성에서 싸워 32명을 목 베었다. 포로가 된 조선 남녀 17명도 구출하였다.
장성의병들도 상당한 희생이 따랐다. 김성진, 허상징, 송정춘, 오인갑 등 전사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장성의병은 이미 1592년과 1593년 두 번에 걸쳐 왜군과의 싸움에 나섰다.
1592년 11월에 창의하여 김경주를 맹주로,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은 장성의병 1천651명은 북상하여 직산과 진위에서 왜적을 참살하고 1593년 2월에 돌아왔다.
1593년 6월에 다시 2차 의병이 일어났다. 김경수의 아들 김극후와 김극순 등이 주도한 800여 명의 장성의병은 진주성에 들어가 복수의병장 고종후 휘하가 되었다. 그들은 6월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 10만 왜군과 싸웠으나 진주성이 함락되자 모두 순절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장성 선비들은 다시 3차 의병을 일으켰다.
1596년에 광주출신인 팔도의병장 김덕령이 이몽학 모반 사건으로 형옥을 당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위태하자 다시 일어났다.
8월16일에 맹주 김경수는 남원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사촌동생 김신남에게 “지난 임진왜란 때 두 아이가 전사한 뒤부터 날마다 원수를 갚을 일만 생각해 왔다”고 호소하면서 의병을 다시 모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기에서 두 아들은 1593년 6월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한 김극후와 김극순을 말한다.
김경수의 말에 김신남이 대답하기를 “우리 형님의 뜻을 아우가 어찌 모르겠습니까.”하고, 같이 남문 밖으로 나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두 번 의거하였으나 실패만 있고 성공이 없었으니 동지들의 마음에 누가 죽음을 원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8월 17일에 김신남은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전주로 향하여 그곳에서 의병과 군량을 모았다.
8월18일에는 고창의 김홍우가 의병 100명, 김중기·박안동·김세 등이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전주에 집결한 600명의 장성의병은 8월19일에 군오를 점검한 후 8월 20일 여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안성에서 직산전투에서 패한 왜군들을 대파한 것이다.
이후 김신남이 이끄는 장성 의병은 9월 10일에 파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맹주 김경수는 반갑게 김신남을 맞이하였다. 그는 김신남이 안성에서 왜적과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이 시는 진주 남강 물에 떠돌고 있을 두 아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진혼가 鎭魂歌이다.
“종제 판관 김신남이 안성에서 왜적을 대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다하여 안성싸움 이겼으니 진주 물가에서 평온치 못하여 떠도는 두 영혼을 위로하노라.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는 '호남오산남문창의비'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3차에 걸쳐 의거한 장성·나주·광주·담양·함평·영광·정읍·고창·부안 · 순창 등 전라도 중서부 지역 16개 고을의 의사 義士와 의승 義僧 72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장성의병들, 그들은 진정으로 대의 大義를 위해 몸을 바친 호남사람들이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장성 남문 창의비각 -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 있다.
2. 장성 오산 창의사 -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 있다.
3. 장성군청 앞에 세워진 호남오산남문칭의비
필자 사정으로 잠시 중단됐던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가 새롭게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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