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 뿌리를찾아-22. 남원성 함락되다(2) - 남원 만인의총 기념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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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 항전 불구 숫적 우위 왜군에 궤멸
패전 짙어지자 양원 등 명나라 군사
줄행랑 이복남 등 전라병사 최후까지 항전후 전몰 |
입력시간 : 2013.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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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인의총 기념관 내부 전경 | |
남원 만인의총 기념관에서 남원성 전투 기록화를 감상한다. 이 그림은 4점인데, 1597년 8월12일 이복남의 남원성 입성,
8월14일 왜군의 공격과 조명 연합군의 반격, 8월15일 총병 양원의 왜군 사신과의 면담, 8월16일 조선군의 최후 전투상황이 설명문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러면 8월13일부터 8월16일까지의 남원성 전투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유성룡의 '징비록' 그리고 신경의 '재조번 방지' 등에 실려 있다.
8월 13일
왜군은 성 밑까지 진출하여 선봉장 고니시의 지휘 아래 남원성을 완전 포위하였다. 먼저 고니시 등은
방암봉(訪巖峰)에 올라서 두 마리 용을 그린 큰 기를 세우고 포를 쏘며 대평소를 불더니 왜적들은 차례로 나뉘어 세 갈래 길로 전진하여 왔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명나라 총병 양원이 지휘하였다. 양원은 이신방과 함께 동문에, 장표는 남문에, 모승선은 서문에, 전라병사
이복남은 북문에서 성을 지키고 있었다. 왜군은 남문은 우키다, 서문은 고니시, 동문은 하치수, 북문은 시마즈가 공격을 맡았다.
12시에 왜적 다섯 명이 곧장
동문으로 들어와서 돌다리 위에 늘어서므로 양원이 몰래 나가서 문밖 성안에 서서 장사를 뽑아 적을 쏘게 하였다. 조선의 명포수 김익룡·양득·정금
등이 일시에 총을 쏘니, 세 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 두 명은 시체를 운반해 물러갔다.
오후 2시에 왜적 수만 명이 성 밖 백
보쯤에 와서 계속하여 총을 쏘고 고함쳤다. 성안에서는 진천뢰를 쏘았다. 그러자 왜군이 많이 다치고 퇴각하였다.
양원은 왜군이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대낮에도 덤비니 밤에는 반드시 뛰어 넘어올 것이라고 여겨 마름쇠를 많이 박아놓고 직접 문밖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8월14일
왜적은 성수원(星宿原)에서 산 가득히 내려오더니 성 밖에 이르러서는 사방으로 나뉘어 이전보다 두
배나 많은 인원으로 토목공사를 시작하였다. 긴 사다리를 많이 만들어 성에 오르는 도구로 삼고 해자를 메워서 길을 만들었다. 또한 민가의 판자를
가져다가 나무에 기대어 세우고 성 밖 민가의 담 벽을 뚫어서 총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성안을 굽어보면서 조총을 쏘니 명나라 군사가 많이 죽어
동남쪽 성가퀴가 텅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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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총 기념관에 있는 남원성 전투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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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무렵에 왜군은 큰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였는데 포 소리가 천지에 울렸다. 서문 앞에 있던 왜적은 만복사의 사천왕(四天王)상을 수레에 싣고 와서 성 밖에 돌며 시위하는
심리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왜군이 이렇게 집요하게 공격하여 오자 양원은 매우 화가 났다. 양원은 말하기를, “적병이 연일 도전하고
아군은 움츠려들고 있으니 이제 군대를 내보내 공격해야 한다”하자, 중군 이신방이 말하기를, “이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니 성을 굳게 지켜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웠는데 적이 퇴각하므로 돌다리
밖에까지 쫓아나갔다. 잠시 후 왜적은 문밖에 잠복해 있다가 포위하려 하므로 양원은 나팔을 울려서 급히 성으로 돌아왔다.
8월15일
왜적들은 성 밖에서 잡초와 벼를 베어 묶으며 크게 단을 만들고 있었다. 성안에서는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양원은 전주에 있는 진우충의 군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군사들은 더욱 초조하여졌다. 벌써 전투 3일째이다.
더욱이나 오늘은 한가위 보름날인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양원은 동문의 성 위에서 바라를 두어 차례 울렸으나 성안은 고요하였다.
사람을 시켜 성 위에 올라가서 두어 번 크게 소리치게 하니, 왜적 다섯 명이 동문 밖에 와서 전갈이 있기를 청하였다. 양원은 통역관을 시켜 몇
마디 주고받게 하였다.
왜적들은 방암봉으로 달려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 몇 마디 말을 하였다. 양원은 그 자리에서 부하 두 사람을
내보내니 왜군들은 그들을 데리고 방암봉으로 갔다. 이후 명군은 선봉장 고니시와 만나 대화를 하였는데 고니시는 명군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저녁 때 고니시가 보낸 왜군
5명이 양원을 찾아왔다. 양원은 왜군을 용성관(龍城館) 자기 처소에 들어오게 하여 접견하였다. 왜군은 양원에게, “급히 성을 비우시오” 하였다.
양원은,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장수가 되어서 천하를 다니면서 싸워서 이기지 않은 전쟁은 없었다. 이제 정예한 군사 십만을 거느리고 와서 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물러나라고 하니 가소롭다” 하였다. 이에 왜적은 “천여 명 패잔병이 어찌 능히 백만의 군사를 당해내겠소.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무슨 은혜를 입었다고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 날 밤늦게 왜적은 짚단으로 참호를 메우고 풀단을 쌓았다.
그것은 성보다도 더 높았다. 조금 있다가 수많은 왜적들이 풀단을 딛고 성위로 올라왔다.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성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명나라
병사들이 서로 울부짖기 시작하였고 백성들도 큰 혼란이었다.
8월16일
왜군은 더욱 거세게 공격하여 새벽 2-3시경에
남문과 서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명군과 조선군을 마구 죽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북문으로 달려갔다.
이 때 왜적은 총병
양원에게 성 밖으로 나가라고 재촉하였다. 양원은 성이 결국 함락될 것을 알고 5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나왔다. 적군이 그를
쫓았지만 양원은 날쌔게 4, 5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몰면서 자신이 탔던 말이 힘이 빠지면 다시 다른 말에 갈아타고 하여 무사히 성을 빠져
나갔다.
한편 명나라 총병 양원은 도망을 갔지만 전라병사 이복남이 거느린 조선군은 이복남의 진두지휘로 용감하게 잘 싸웠다. 양원은
남원성을 탈출할 때 이복남에게 사람을 보내어 성을 버리고 함께 피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이복남은 '나는 이 성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하였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랴'하고 거절하였다. 그는 부하에게 명령하여 나무 섶을 가져오게 하여 쌓아놓고는 언제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
오응정, 김경로와 함께 큰 칼을 뽑아 들고 독전하면서 왜적과 싸웠다.
그러나 더 많은 왜군이 몰려들어 조선군이 힘이 다하자,
전라병사 이복남은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을 조용히 쳐다보며 “이제 우리 갈 길을 갑시다”하였다. 이들은 모두
태연자약하게 섶단으로 걸어가 불속에서 순절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용사들도 피눈물을 흘리며 있는 힘을 다하여 왜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죽었다.
그런데 명나라 유격 진우충은 남원이 함락되자 바로 전주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주를 점령하였다. 나중에 명나라는 총병 양원과 유격 진우충을 베어 죽이고 그 머리를 우리나라에
조리돌리었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정말 잔인하였다. 산하를 불태우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었다. 코는 전리품의
상징이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남원성 전투를 종군했던 일본 승려 쿄넨은 8월16일자 '조선일기'에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편찬한 이수광(1563~1628)은 다음 시를 지어
남원성에서 순절한 이들을 위로하였다.
외로운 성에 피비(血雨)가 날리던 옛일을 생각하니 憶昔孤城血雨飛
서생(書生)은
겹겹 포위망을 깨뜨릴 힘이 없었네. 書生無力破重圍
지금 남은 자리엔 가을 풀만 쓸쓸한데 至今遺跡空秋草
흐르는 눈물이
석양의 나그네 옷 적시는구나. 淚入斜陽濕客衣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