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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퇴계와 고봉을 다시 생각한다. 김세곤 글, 무등일보

기고-퇴계와 고봉을 다시 생각한다.
입력시간 : 2012. 06.11. 00:00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퇴계와 고봉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사단칠정논변이다.

두 사람은 조선 유학사에 있어 가장 큰 사상 논쟁인 사단칠정논변의 주인공이었다. 1558년 10월, 이제 막 과거시험에 합격한 32세의 열혈청년 고봉 기대승(1527-1572)은 국립대학교총장인 58세의 대 유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을 서울에서 만나 퇴계의 사단칠정에 대한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理)와 기(氣)는 분리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퇴계 역시 종래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와 기는 분리되며 인간의 이성이 감정을 컨트롤 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8년 동안이나 치열한 이기 논쟁을 하였다.

명종 시절은 유학이 상당히 위축된 시기였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로 임명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었다. 외척 윤원형의 정권 농락에 선비들은 기를 못 피었고, 의식 있는 사림들도 숨죽이고 지내거나 시골로 낙향하였다.

이런 시기에 퇴계와 고봉의 성리학 핵심 이론 논쟁은 장안의 화제였다. 많은 조선 선비들이 이 논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성리학 공부를 다시 하였다. 퇴계와 고봉의 심오한 철학 논쟁은 성리학을 중흥 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퇴계와 고봉은 1558년부터 1570년 12월 퇴계가 별세할 때까지 13년간 110통 이상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서로 소통하였다. 두 사람은 26살의 나이 차이를 초월하여 흉금을 털어놓고 정치, 사회, 철학, 개인사, 가정사 등을 전 방위적으로 대화하였다.

특히 두 사람의 소통은 요즘말로 소셜 네트워크였다. 퇴계와 고봉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는 배달부에 의하여 필사되어 주변 선비들이 모두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퇴계와 고봉,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퇴계는 고봉에게 영원한 멘토이고 스승이었다. 고봉은 퇴계를 항상 그리워하고 존경하였다.

오로지 주자(1130-1200)를 외치며 주자학을 불교, 도교, 양명학 등 다른 학문으로부터 조선의 통치철학으로 확립하는데 앞장 선 퇴계에게, 고봉은 성리학을 이끌어갈 수법제자였고 때로는 학문적으로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퇴계와 고봉, 두 사람은 주자학을 조선의 이데올로기로 확립시키기 위하여 도반의 길을 걸었다.

또한 외척과 권신에 의해 농락당한 조선을 개혁하기 위하여 두 사람은 뭉쳤다. 고봉이 개혁당 대표로 나서고 퇴계는 후견인이 된 것이다. 이 시기 개혁당에는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 박순, 심의겸, 윤두수, 허엽 등 퇴계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 때 고봉은 영의정 이준경과 맞서다가 핍박을 당하고 광주로 낙향하였다. 이 때 퇴계는 고봉에게 더욱 신독하고 정진하면서 때를 기다리라고 조언하였다.

요즘 한국고전번역원과 도올 김용옥이 주관하는 인문학 콘서트 ‘고전의 향연’ 강좌가 조선의 역사와 사상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인기이다. 여기에는 퇴계와 율곡, 남명 조식 등 조선 선비들의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퇴계의 경우는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쟁이 강의의 중심이다. 그런데 이 강좌에서 퇴계가 누구인지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고봉에 대하여는 언급이 너무 간단하여 아쉽다.

몇 년 전에 광주에 근무할 때 아시는 분들에게 가끔 물어 본 말이 있다. 고봉 기대승이 누구인가? 사단칠정논변에 대하여 아시는가? 월봉서원을 가 본 적이 있는가?

필자의 이런 물음에 10명중 6-7명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지금은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고봉 기대승을 알고 월봉서원도 가 보았으리라.

퇴계와 고봉이 한 세대를 넘어 13년간이나 소통하고, 영남의 퇴계가 자신이 직접 가르친 제자를 제쳐두고 호남의 고봉을 선조 임금에게 명유(名儒)로 추천한 것과 영·호남의 신진 유학자들이 힘을 합쳐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요즘 필자는 퇴계와 고봉을 다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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