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시가 있는 교육,시가 있는 사회
/송석구 세종시민관합동위 민간위원장·가천의대 총장
프랑스에서는 고교 졸업 때까지 자국의 명시를 100편 이상 외우게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본떠 시를 외우게 하는 중고교가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참 좋은 모방이다. 창조는 모방의 과정을 비켜갈 수 없다.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가 1999년이었다. 푸시킨 탄생 200주년이라고 여기저기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를 실은 택시운전사가 푸시킨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러시아 택시 운전사를 결코 무시해서가 아니다. 시가 대중에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표시로 읽혀졌다.
중국에서는 '당시(唐詩)'라고 한다. 당나라 때 두보, 이백, 백거이와 같은 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그들이 쓴 주옥 같은 시편들이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은 골목을 지날 때, 2층에서 화분을 떨어뜨리면 열에 여덟은 시인이 맞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중국인이면 누구라도 시를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야기다.
모두 시인이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회다. 우리 사회도 많은 젊은이가 문학소녀와 문학청년을 꿈꾸며 한때를 보낸 세대가 있었다. 작은 도회지에서도 예술회관 같은 곳에서 '시 낭송의 밤' '문학의 밤'과 같은 행사가 숱하게 열렸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차고 넘치던 시절이었다. 말 그대로 '버지니아 울프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던 세월이었다.
지금은 가히 연예인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너도 나도 '연예인'이 꿈인 세상이다. 대학마다 연극영화과는 차고 넘친다. 100대 1에 가까운 엄청난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연극영화과가 있는 대학은 분위기부터가 밝고 화사하다.
이를 탓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세상은 변했고 아이들의 꿈은 달라졌다. 꿈꾸는 아이들은 아름답고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은 힘차다. 또 내일의 세계는 이 아이들의 몫이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이미 새로운 한국을 선언하고 있다. '쾌속세대'로 불리기 시작한 우리의 젊은이들은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일궈냈다. 젊은이들 스스로 만들어 낸 그들만의 질주였다. 말로 백날 떠들고 구호로 외친들 무슨 소용인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김연아의 완벽한 연기가, 모태범의 500m 쾌속 질주가, 이승훈의 1만m 끈기와 지구력이 백 마디 말보다 더한 무게를 지닌 진짜 글로벌이다. 세계와 경쟁하고 여기에서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보다 더 한 글로벌은 없다. 우리 아이들이 참으로 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정체해 있는 글로벌은 없다. 스티븐 잡스의 아이 패드가 끝없이 진화하듯이 글로벌 기업으로 일본의 자존심이었던 도요타 자동차가 하루아침에 추락하듯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오늘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해서 내일을 장담할 수는 없다. 동계올림픽도 4년 뒤에 또 다시 열릴 것이고 더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아이들이 배우고 익히는 교육현장에서 연일 비리가 쏟아져 나와 평생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그지 없다. 어른들의 비리 속에서도 아이들이 올곧게 자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교육현장의 질 저하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중등 교육현장의 비리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출세를 위해 교육감 선거에 줄을 대고 금품이 오갔다니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아이들이 학교 교사보다 학원 교사를 더 신뢰한다는 여론 조사에 '설마'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알몸 졸업식'이니 '교사 폭행'이니 '학교 폭력'이니 하는 일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교육 현장까지 지연·학연·혈연으로 뭉치고 여전히 신분·계급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이러니 아이들이 '내공'을 쌓지 못한다. 체력은 글로벌인데 삶의 기본기가 턱없이 약하고 부족하다. 쉽게 얻으려 하고 쉽게 포기하고 좌절한다.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부산 '김길태 사건'도 결국 이 연장선에 있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보고 배울 게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김연아의 힘은 기계적인 동작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단 한 번의 완벽한 점프를 위해 빙판에 천 번 이상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과 아픔의 결과물이다. '007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이를 스케이트로 이해하고 표현해 내는 상상력과 창조의 결과다. 음악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을 온 몸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빙판 위에서 그런 연기가 나올 수가 없다. 바로 시인의 마음이다.
스티븐 잡스의 정보기술(IT)은 기술력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한다. 휴대폰에, 컴퓨터에 철학을 입히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상상력과 시의 창조력이 경쟁력인 셈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다. 빙상에서도, 무대에서도, 교육현장에서도 인문학적 소양에 바탕을 둔 삶의 내공이 없다면 절대 오래갈 수 없다. 미래를 응시할 수 있는 힘과 균형, 굴하지 않는 유머와 끈기와 같은 내실이 함께 하지 않으면 잠시 피었다 사라질 뿐이다.
요즈음은 굳이 시집을 들고 다니지 않더라도 지하철 전동차 유리문에서조차 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빈 유리벽에 적힌 사물과 인생의 깊은 지혜가 스며 있는 시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건물 외벽에 내걸린 대형 시판(詩板)은 서울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요즈음은 '내가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가 걸려 있다. 정석남 시인이 시 '그리운 시냇가'의 한 대목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시를 읽히고 외우도록 가르쳐야 한다. 잊혀져 가는 시인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되살려 줘야한다. 시가 있는 교육, 시가 있는 세상은 봄처럼 맑고 화사할 테니까.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가 1999년이었다. 푸시킨 탄생 200주년이라고 여기저기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를 실은 택시운전사가 푸시킨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러시아 택시 운전사를 결코 무시해서가 아니다. 시가 대중에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표시로 읽혀졌다.
모두 시인이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회다. 우리 사회도 많은 젊은이가 문학소녀와 문학청년을 꿈꾸며 한때를 보낸 세대가 있었다. 작은 도회지에서도 예술회관 같은 곳에서 '시 낭송의 밤' '문학의 밤'과 같은 행사가 숱하게 열렸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차고 넘치던 시절이었다. 말 그대로 '버지니아 울프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던 세월이었다.
지금은 가히 연예인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너도 나도 '연예인'이 꿈인 세상이다. 대학마다 연극영화과는 차고 넘친다. 100대 1에 가까운 엄청난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연극영화과가 있는 대학은 분위기부터가 밝고 화사하다.
이를 탓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세상은 변했고 아이들의 꿈은 달라졌다. 꿈꾸는 아이들은 아름답고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은 힘차다. 또 내일의 세계는 이 아이들의 몫이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이미 새로운 한국을 선언하고 있다. '쾌속세대'로 불리기 시작한 우리의 젊은이들은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일궈냈다. 젊은이들 스스로 만들어 낸 그들만의 질주였다. 말로 백날 떠들고 구호로 외친들 무슨 소용인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김연아의 완벽한 연기가, 모태범의 500m 쾌속 질주가, 이승훈의 1만m 끈기와 지구력이 백 마디 말보다 더한 무게를 지닌 진짜 글로벌이다. 세계와 경쟁하고 여기에서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보다 더 한 글로벌은 없다. 우리 아이들이 참으로 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정체해 있는 글로벌은 없다. 스티븐 잡스의 아이 패드가 끝없이 진화하듯이 글로벌 기업으로 일본의 자존심이었던 도요타 자동차가 하루아침에 추락하듯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오늘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해서 내일을 장담할 수는 없다. 동계올림픽도 4년 뒤에 또 다시 열릴 것이고 더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아이들이 배우고 익히는 교육현장에서 연일 비리가 쏟아져 나와 평생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그지 없다. 어른들의 비리 속에서도 아이들이 올곧게 자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교육현장의 질 저하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중등 교육현장의 비리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출세를 위해 교육감 선거에 줄을 대고 금품이 오갔다니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아이들이 학교 교사보다 학원 교사를 더 신뢰한다는 여론 조사에 '설마'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알몸 졸업식'이니 '교사 폭행'이니 '학교 폭력'이니 하는 일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교육 현장까지 지연·학연·혈연으로 뭉치고 여전히 신분·계급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이러니 아이들이 '내공'을 쌓지 못한다. 체력은 글로벌인데 삶의 기본기가 턱없이 약하고 부족하다. 쉽게 얻으려 하고 쉽게 포기하고 좌절한다.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부산 '김길태 사건'도 결국 이 연장선에 있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보고 배울 게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김연아의 힘은 기계적인 동작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단 한 번의 완벽한 점프를 위해 빙판에 천 번 이상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과 아픔의 결과물이다. '007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이를 스케이트로 이해하고 표현해 내는 상상력과 창조의 결과다. 음악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을 온 몸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빙판 위에서 그런 연기가 나올 수가 없다. 바로 시인의 마음이다.
스티븐 잡스의 정보기술(IT)은 기술력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한다. 휴대폰에, 컴퓨터에 철학을 입히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상상력과 시의 창조력이 경쟁력인 셈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다. 빙상에서도, 무대에서도, 교육현장에서도 인문학적 소양에 바탕을 둔 삶의 내공이 없다면 절대 오래갈 수 없다. 미래를 응시할 수 있는 힘과 균형, 굴하지 않는 유머와 끈기와 같은 내실이 함께 하지 않으면 잠시 피었다 사라질 뿐이다.
요즈음은 굳이 시집을 들고 다니지 않더라도 지하철 전동차 유리문에서조차 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빈 유리벽에 적힌 사물과 인생의 깊은 지혜가 스며 있는 시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건물 외벽에 내걸린 대형 시판(詩板)은 서울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요즈음은 '내가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가 걸려 있다. 정석남 시인이 시 '그리운 시냇가'의 한 대목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시를 읽히고 외우도록 가르쳐야 한다. 잊혀져 가는 시인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되살려 줘야한다. 시가 있는 교육, 시가 있는 세상은 봄처럼 맑고 화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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