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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를 기리면서

화표학 ,병든학 -하서의 자전 시

화표학 華表鶴, 병학 病鶴


# 1.  화표학

    

화표학  華表鶴



끝없는 벌판 갈 길 멀다

천길 화표주 華表柱. 하늘로 솟았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어디로 가는 길손일까.

표연히 날아든 하늘 신선


平原極望路沼沼    평원극망로소소

有柱倚空千尺高    유주의공천척고

玄裳縞衣何處客    현상호의하처객

飄然自是天仙曺    표연자시천선조


서글퍼 맴맴 돌아 오랫동안 머뭇머뭇

옛 성곽엔 쑥대만 남았다오.

길다란 울음소리 하늘에 번지오.

만리를 부는 바람, 눈빛 터럭 불어가네.


徘徊怊悵久不去    배회초창구불거

向來城郭皆蓬蒿    향래성곽개봉호

長吟一聲天宇闊    장음일성천우활

萬里斜風吹雪毛    만리사풍취설모



 언제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의 말년 작품으로 생각되는 화표학. 화표기둥(화표주)에 날아와 앉았다가 신선이 되어 하늘나라로 날아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을 노래한  자전적 시. 하서와의  대화체 책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를 쓴 백승종 교수는  이시를 하서의 심리적 자서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데, 하서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학처럼 고고하고 고매하고 신선으로 살고 싶었나 보다.


원래 화표학은 중국 한나라 요동 사람 정령위 丁令威라는 선비가  신선이 되었다가 천년 만에 학이 되어 고행에 돌아와 화표주(망주석,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에 앉았다가 시를 읊고 다시 하늘로 날라 갔다는  고사가 있는 학이다.


이런 학이 되고 싶은 하서이지만  세상은 쑥대밭이고  눈물과 회한이 남아서 이 세상을 유유히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병든 학이라고 표현한다.   



# 2. 병든 학

    

병든 학


산언덕에서 슬피 울어도 알아줄 사람 그 누구랴

날개를 드리운 채 마른 가지에 기대었네.

하늘가를 돌아다보니 구름은 아득한데

만리를 돌아갈 생각 부질없이 지녔구려.



병학  病鶴


山畔哀鳴知者誰    산반애명지자수

還堪垂翅倚枯枝    환감수시의고지

回看天際雲猶逈    회간천제운유형

萬里歸心空自持    만리귀심공자지


마음은 화표학을 꿈꾸지만 현실은 병든 학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부질없이 지은 시. 그럼에도 하서는 자신을 병들었지만 학으로 자처한다. 병든 학이나 고고한 학이라고 자부를 한다.

내세에서도 학으로 환생하여 살고픈 그를 보는 것 같다.



# 3 죽은 하서를  자미궁에서 만나다.


 그런데 허균의 <학산초담>과 <성수시화> 그리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등에는  오세억이라는 사람이 하서 김인후를 자미궁에서 만난 일화가 실려있다. 먼저 허균의 <학산초담>을 살펴보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죽은 뒤, 오세억(吳世億)이란 자가 갑자기 죽더니 반나절 만에 깨어나서는, 스스로 하는 말이, 어떤 관부(官府)에 이르니 ‘자미지궁(紫微之宮)’이란 방이 붙었는데 누각이 우뚝하여 난새와 학이 훨훨 나는 가운데 어떤 학사(學士) 한 분이 하얀 비단 옷을 입었는데, 흘긋 보니 바로 하서였다. 오씨는 평소에 그 얼굴을 알고 있는데, 하서가 손으로 붉은 명부를 뒤적이더니, “자네는 이번에 잘못 왔네. 나가야겠네그려.”하더니,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했다.


     세억은 그 이름 자는 대년 / 世億其名字大年

     문 밀치고 와서 자미선 뵈었구려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에 또 일곱 된 뒤에 다시 만나리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상 돌아가선 함부로 말하지 마오 / 歸去人間莫浪傳


  깨어나자 소재 상공(蘇齋相公)께 말씀드렸다. 그 뒤에 오씨가 일흔일곱 살에 죽었다. 인후(麟厚)의 자는 후지(厚之), 울주인(蔚州人)이며 벼슬은 교리(校理)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



아마 오세억이란 자는 하서와 같은 고향에 사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는 갑자기 죽었는데 저승에서 자미궁의 신선으로 있는 하서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하서가 명부를 보고 아직 때가 안 되었으니 그를 다시 이승으로 가라고 하면서 지어 준 시가 바로 위 시이다. 오세억은 이 시를 소재 노수신에게 보여주었다.


  허균이  이 이야기를 직접 지었을 리는 없고 그동안 전해오는 이야기를 정리한 듯 하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재미가 있다.  저승에 가서도 신선이 되어 시를 짓는 하서. 그야말로 학과 같은 풍모이다. 그리고 그가 머물고 있는 곳 이름 또한 자미궁이다. 


 한편 허균의 <성수시화>에는 내용은 비슷하나 오세억이 동네사람이 아니고 영남의 하양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서가 죽은 후 영남(嶺南)의 하양(河陽)에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소생하여 말하기를, “꿈에 천부(天府)에 갔었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소원(小院)으로 데리고 가니 거기에 윤건(綸巾)을 쓴 학사가 있어 김하서라고 하면서 ‘너는 금년에 하늘에 오름이 합당치 않으니 나가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며 시로써 보냈는데 그 시는

세억은 그 이름, 대년(大年)은 그 자(字)인데 / 世億其名字大年

천문(天門)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 뵈었더라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 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볼지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계 돌아가 함부로 전치 말라 / 歸去人間莫浪傳”

고 하였다.세억은 효자였는데, 그 후 과연 77세에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영남에서도 호남의 하서를 알아 보았으니 하서의 이름은 죽어서도 널리 알려진 모양이다.  저승에서도 하서가 학처럼 신선처럼 지내고 있다는 일화가 야화로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지고 있으니 하서는 죽어서도 행복한 사람이다.   

 

 

 

 광주 중외공원에 있는 하서 김인후 동상

 

 

 장성 필암서원 입구. 서원 입구가 특이하다.  송시열이 쓴 확연루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