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의 우정
2009.2.5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한 선비 하서 김인후(1510-1560)와 기록의 달인으로 <미암일기>를 남긴 미암 유희춘(1513-1577)은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하여 화순 동복으로 유배를 온 신재 최산두 밑에서 같이 동문수학 한 사이이다. 미암은 해남 출신으로 그의 외조부 최부가 무오(1498) 갑자사화(1504)로 화를 입었고, 그의 형 유성춘(1495-1522) 또한 기묘사화로 죽은 비극적인 집안에서 산 인물이다.
하서는 장성에서 태어났는데 비교적 윤택하게 살았으나 미암은 상당히 곤궁하고 박해를 당하는 입장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미암의 아버지 유계린은 최산두와 함께 한훤당 김굉필에게 공부를 배운 사림이어서 그의 자부심은 상당히 강하였으리라.
하서와 미암의 우정은 하서가 1540년에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더욱 돈독하여 진다. 그해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하서는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한 상태이었다. 당시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관원이었던 미암은 하서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극진하게 병 수발을 하였다. 그리하여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간 하서는 다시 살아났고 그 후 그는 과거에 합격하였다. 또한 1543년 겨울에 미암이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굳이 옥과 현감으로 있는 하서를 찾아와 <효경간오> 한 질을 놓고 간적도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547년(명종2년) 미암은 윤원형 일파에게 잘 못 보여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런데 제주가 그의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그는 다시 두만강 근처인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가 된다. 미암은 전라도에서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가는 도중에 하서를 만난다.
하서는 천리 길을 떠나는 미암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실낱같은 재회를 기약하며 시를 짓는다.
술에 취해 꺾었다오. 버들가지 하나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는 데. 한없는 이 정을 어이하리.
만리라. 내일이면 머나먼 길을 뜬다지.
저 달이 몇 번이야 밝아야 그대 돌아오려나.
그리고 하서는 ‘자네가 멀리 귀양을 가고 처자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 자네의 아들을 나의 사위로 삼겠노라’고 한다. 그 당시 미암의 외아들 유경렴은 벼슬도 못하고 조금 못났다 한다. 따라서 하서 집안에서 반대를 하였으나 하서는 셋째 딸을 미암의 외아들에게 시집보낸다. 미암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성옹지소록>에 전하여 진다)
그 후 장성에 낙향하여 살고 있는 하서는 종성에서 유배중인 미암에게 자주 안부 편지를 보낸다.
아름다운 아미암 같은 사람
어찌 이리도 생각나게 하는 가
언제 함께 평상에 앉아
책 펴고 조금씩 갈라 밝힐 수 있을 지
이 시는 하서가 미암에게 보낸 시이다.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종성에서 유배중인 미암 또한 하서를 그리워한다. 아래 시도 답서의 하나이다.
종성은 천하의 궁벽한 곳
티끌 모래 날로 일어 자욱만 하네.
사투리를 잃지 않은 십년 나그네.
부질없이 고향 꿈만 꾸고 있다네.
북쪽 변방 아무도 물어오는 사람 없는데
하서 혼자 나를 생각하며
삼 백 자나 되는 시를 새로 적어 보내
털끝만큼 어긋나다 크게 그르쳤음을 말해주네.
그리고 하서의 건강 걱정도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하서는 미암이 유배중인 1560년에 세상을 뜬다. 친구요 사돈을 잃은 미암의 마음은 정말 슬펐으리라.
한편 하서의 시 중에는 미암의 며느리가 된 셋째 딸에게 보내는 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유씨에게 시집 간 딸에게 지어주다.
내 친구는 북방에 귀양 가 있고
네 지아비도 만리를 따라 갔구나
가을바람에 시름겨운 생각 그지없는데
들국화가 술잔 속에 떠 있구나.
與柳氏女
我友在朔方
汝夫隨萬里
秋風意無窮
野菊盃觴裡
이 시에서 하서는 시아버지가 유배 중에 있고 남편도 함경도 종성에 가 있어 시집살이를 하기가 얼마나 힘 드는 지를 적고 있다. 당시 시어머니 송덕봉은 미암을 챙겨주려고 담양에서 만리나 되는 종성을 왔다 하였으니 살림은 하서 딸이 도맡아 했어야 하였다. 하서는 자기가 고집을 피워서 이런 어려운 곳으로 시집을 보냈으니 마음이 더 상하였으리라.
한편 미암 유희춘은 선조가 즉위하자 20년간의 유배 생활이 풀리고 다시 복직하여 승승장구를 한다. 그리고 그가 남긴 미암일기(선조 1년부터 죽기 전인 1577년 선조 10년까지의 기록)는 16세기 조선 시대의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서 보물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암의 삶의 흔적이 있는 곳은 바로 그의 부인 송덕봉이 태어난 처가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이다. 거기에는 미암이 늙어서 지냈다는 연계정과 미암일기를 보관한 모현관이 있다. 그리고 미암과 그의 부인송덕봉을 모신 사당도 그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 뒤에 있다.
참고로 허균의 성옹지소록을 말미에 붙인다.
김하서(金河西 하서는 김인후(金麟厚)의 호)가 급제하기 이전, 반궁(泮宮 성균관)에 있을 때였다. 그때 전염병에 걸려 위독하니 사람들이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이 당시 관관(館官 성균관의 관원)으로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애석히 여겨 자기 집에 메어다 두고는 밤낮으로 돌보아 끝내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하서는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뒷날 미암이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을 때, 하나 있는 자식이 매우 어리석었다. 하서가 그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온 집안이 모두 찬성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고 끝내 혼인을 치르니, 사람들이 하서와 미암을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미암 선생(眉庵先生)은 금남(錦南) 최보(崔溥)의 외손이다. 금남은 선릉(宣陵 성종의 능호)과 연산군(燕山君) 때에 큰 명망이 있었고, 문장에도 매우 능했는데 무오년(1498, 연산군4)의 사화(士禍)에 죽었다.
공은 형인 성춘(成春)과 더불어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성춘은 벼슬이 헌납(獻納 사헌부의 정5품관)에 이르렀고, 일찍 죽었다. 공은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에 을사년(1545, 인종1)의 변을 만나 처음에는 제주(濟州)로 유배되었으나 고향과 가깝다 하여 종성(鍾城)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총명이 뛰어나서 읽은 책치고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지에 있을 때 《속몽구(續蒙求)》 4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암송하고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이다.
선왕(先王 선조를 가리킴)조에 발탁되어 경연(經筵)에 있었는데 주상을 규익(規益 경계하여 보익함)한 공이 매우 많았다. 주상이 장차 중용(重用)하려던 참이었는데 공이 갑자기 죽으니 주상이 매우 슬퍼하며, 찬성(贊成)을 추증(追贈)하고 공의 아들을 등용하였다.
하서 김인후가 배향된 필암서원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소재)
미암일기가 보관되어 있는 모현관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소재)
'하서 김인후를 기리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서 김인후 답사 - 난산 (0) | 2009.03.05 |
---|---|
하서 김인후 흔적 답사 2 -백화정 (0) | 2009.03.04 |
하서 김인후 흔적을 찾아서 - 장성 맥동마을 (0) | 2009.03.04 |
화표학 ,병든학 -하서의 자전 시 (0) | 2009.02.12 |
여종 소합의 죽음을 슬퍼하며 -하서 칠석부 (0) | 2009.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