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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윤선도 집터 -명동 명례방

 

  명동성당 정문 입구 바로앞이다.

  한국증권 금융과  민들레영토 사이에  표시석이 있다.

 

  윤선도 집터 . 1988년 12월 한국관광공사에서 만든 것이다.

 이 표시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윤선도(1587-1671)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이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의 쌍벽이라고 평가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생활을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다섯 벗으로 비유하여  지은 <오우가>가

  유명하다.

  명동성당 정문에서  찍은  명례방

 

 

3.10 월요일 오후에 윤선도 집터를 찾았습니다.  고산 윤선도가 양자를 간  종가집 윤우기의 집터인  명동 명례방을 찾았습니다.

 

거기에는 < 윤선도 집터> 라는 표시석이 있었습니다.  명동 성당  정문  앞. 대한 YWCA 연합회 건물의 민들레 영토

입구 한곳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윤선도의  가계 家系> 

 

  고산 윤선도 선생은 1587년(선조 20) 6월 21일 한경 동부 연화방(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예빈시 부정(禮賓寺 副正)인 아버지 유심(惟深)과 어머니 순흥안(安)씨의 세 아들 중 차남으로 탄생하셨다.  생모 안씨는 좌의정 현(玹)의 손녀이다.


해남윤씨의 시조 존부(存富)로부터 16세손이며, 고조부는 국자상사(國子上舍) 효정(孝貞)이니, 무갑(戊甲:무오사화, 갑자사화) 이후로 은거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스스로 호를 어초은자(漁樵隱者)라 하였고 후에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해남윤씨의 중흥을 이루었다. 증조부는 귤정 구(衢)이며
기묘명신(己卯名臣)으로 홍문관 부교리를 역임하다가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조부는 의정부 우참판 의중(毅中)이다. 고산선생은 8세에 숙부되는 관찰사공 유기(唯幾)와 양모 능성구(具)씨의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 구(衢)는 홍중(弘中), 의중(毅中), 공중(恭中)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홍중(弘中)이 아들이 없어 의중(毅中)의 아들 유심(唯深), 유기(唯幾), 유순(唯순) 가운데 유기(唯幾)로서 대를 이었다. 그러나 또 유기(唯幾)가 아들이 없게 되자 유심(唯深)의 아들 선언(善言), 선도(善道), 선하(善下) 중 선도(善道)로서 대를 잇게 되었다. 유기(唯幾)는 유심(唯深)의 동생이나 큰집 홍중(弘中)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고산선생은 유기(唯幾)를 백부라 부르지 않고 그냥 아버지라 불렀다.
17세에 남원윤씨(판서 윤 돈(暾)의 따님)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는데 인미(仁美), 의미(義美), 예미(禮美) 그리고
두 딸이 있으니, 사위는 심광면(沈光沔:청송)과 이보만(李保晚:광주)이며, 추우당 심단(沈檀)이 심광면의 아들이다. 첩실(妾室)에서는 2남3녀를 두었는데 순미(循美), 학관(學官) 직미(直美)이고, 서출녀는 직강(直講) 이익로(李翼老)의 첩과 황도빈(黃道彬), 양헌직(楊憲稷)의 처이다


증손자 공재 두서(斗緖)는 국보240호 자화상을 그린 화가로 잘알려져 있으며, 덕희(德熙), 용 까지 3대가 화가로써 유명하다. 그리고 공재 두서(斗緖)가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 즉 다산 정약용의 외갓집이 해남윤씨 가문이다.

 
 (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 홈페이지에서 따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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