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 허목 ( 1595-1682) 17세기 붕당정치에 있어서 남인의 핵심인물중 한사람이 허목이다.
그는 소북 계열로서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자 남인에 편입한 근기남인이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풍류아 백호 임제이다. 그는 서화담과 조식의 학풍을 이어 받았다.
그의 자는 문보 (손바닥에 글월 문자가 새겨져 있다하여 그리 부름) 이며 호는 미수( 눈썹이 눈을 덮을 정도로
길어서 붙인 이름) 이다.
그는 인조반정이후 산림에서 학문을 하면서 살았는 데 효종의 부름을 받아 그의 나이 63세에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와 윤선도와의 인연은 다음 3가지이다.
하나는 1660년 1차 예송에서 3년설을 주장하다가 서인에게 패하여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가고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한 것이다.
둘째는 남인 계열 중에서도 강경파 계열이었다. 윤선도 사후에 일어난 제2차 예송(1674년) 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여 유배를 간 송시열에 대한 처리문제로 그는 강경입장을 견지하여 청남의 거두로 등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허적은 탁남으로 불리운다)
세째는 그는 1679년에 윤선도의 신도비를 지었다. 윤선도의 손자 이후가 비를 지어줄것을 부탁하여 지었다.
그는 이 신도비에서 윤선도를 의리를 지키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
해남군 금쇄동 . 윤선도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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