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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

강진 무위사가 이런 곳이라니...

 

 

 

당나라 오도자(吳道子)가 무위사로 간 까닭
[오마이뉴스 2003-10-25 11:15]
▲ 국보 13호 무위사 극락보전
ⓒ2003 김대호
무위사 입구 전통 찻집 마루에 앉아 찻잔 식는 줄도 모르고 풍경 소리에 실려 오는 가을을 듣는다. 이렇게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면 불쑥 지식도 권세도 돈도 사랑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가야산을 등산하던 길에 문득 바위를 올려 보다가 깜짝 놀랐지. 바로 앞에 비구 스님 한 분이 볕을 쪼이고 있는데 나말고는 아무도 발견을 하지 못했어. 완전히 주변 풍경과 한 몸이라 보지 못한 거지.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실핏줄까지 선명했고 핏기 없이 하얀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괜스레 슬픈 마음에 가슴까지 두근거리고 최면에나 걸린 것처럼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니까."

당최 남자를 모르고 노동 운동으로 서른 중반을 넘겨 버린 선배 누나의 첫사랑은 아이러니하게 속세와 연을 끊어 버린 스님이었다. 한동안 불교에 심취해 '인연'에 대해 강의를 해대던 선배는 수차례 해인사 행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스님을 만나지 못했고 늦은 홍역에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 이듬해에 속세의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 벽화보존각의 무위세상으로 승천하는 선녀상
ⓒ2003 김대호
바람과 하늘, 흙이 그러하 듯이 그 비구 스님처럼 우리도 자연과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낱 춘몽(春夢)에 불과했던 것일까?

무위사 극락보전 툇마루에 앉아 노자의 무위(無爲)와 우리의 미륵(彌勒)을 생각했다.

노자는 "학문을 하면 날로 보태는 것이고, 도를 함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덜고 또 덜어서 함이 없음(無爲)에 이르면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무위를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之於無爲 無爲而無不爲 爲無爲 則無不法)"고 무위를 논하였다.

이름대로 한다면 무위사는 '존재하지 않는 절'이며 '소유함이 없는 절'이다. 부질없는 속세와의 인연을 마다하고 자연으로 무화(無化)되기를 바라는 은둔의 사찰인 것이다. 물론 도피와는 다른 무정부주의자들의 그것처럼 무위 세상에 대한 꿈을 일구는 은둔이었을 것이다.

유가(儒家)가 의식적 행위인 유위(有爲)와 인위(人爲)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반해 도가의 무위는 자연이 흘러가는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며 인위적으로 꾸며내지 않는다. 무위를 통해 인위를 초월한 고차원적인 자연 행위, 완성적 행위를 찾아 세상의 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당나라 도인들은 똑똑한 유학자들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벗어나 전제 군주를 천하의 주인으로 받들고 예를 내세워 법과 제도를 만들어 백성들 위에 속박하는 것이 역겨워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택한 것이 아닐까?

노자는 '총명과 지혜를 끊어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 배로 늘 것이다. 인(仁)과 의(義) 같은 도덕을 끊어 버리면 백성들이 옛말처럼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다. 정교하고 편리한 물건들을 없애 버리면 도적이 사라질 것이다'고 유학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일갈을 날린다.

▲ 당 화가 오도자가 그렸다는 벽화들
ⓒ2003 김대호
나는 문득 당나라 화가 오도자(吳道子)가 멀리 백제 땅 강진까지 와서 마흔 아홉 날을 자지 않고 천 분의 부처를 그린 것은 유학자들에 의해 좌절된 무위의 꿈을 백제 땅 무위사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오도자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무위 세상을 꿈꾸는 도인(道人)들을 일컫는 도자(道者)가 아니었을까?

▲ 보물507호 선각대사편광탑비
ⓒ2003 김대호
그러나 천불천탑을 세워 미륵 세상의 배를 띄우려던 운주사의 꿈이 하룻밤의 꿈으로 사라졌 듯이 49일을 작정하고 천불을 그리던 오도자의 무위 세상도 단 하루를 남기고 백제의 멸망과 함께 파랑새가 되어 날아갔다. 미완의 새 세상을 상징하듯 지금도 극락보전 벽화의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유일하게 없다.

그로부터 1500여 년이 지나고 이제 무위 세상의 꿈도 국보가 된 극락전도 보물이 된 아미타삼존도, 양류백의관음도, 아미타 7존도, 아미타내영도, 연화절지화병도, 비천선관음도와 같은 30여점의 벽화들과 선각대사 편광탑비도 옛이야기가 되고 일장춘몽이 되어 박제가 되었다.

한때 신천지를 꿈꿨던 이들이라면 이 가을, 극락보전과 벽화보존관에 박제된 무위 세상의 꿈을 찾아오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잠시 짬을 내어 극락보전을 왼편으로 돌아 터를 잡은 미륵전에 가서 운주사의 그것처럼 못생긴 미륵부처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다시 무위사에 가을이 익는다. 극락보전 앞 감나무에 열린 홍시에는 부지런히 까치가 날아들고 느티나무는 녹의를 벗고 갈옷으로 갈아입는다. 저 나무처럼 겨울이 오기 전에 훌훌 벗어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람들의 외투는 여전히 두텁다.

▲ 무위사 삼층석탑
ⓒ2003 김대호


/김대호 기자 (taboocut@korea.com)


덧붙이는 글
오도자(吳道子)는 누구인가?

유년 시절 이름은 도자(道子)인데 당 현종(712∼756)이 도현이라 고쳤다. 당 궁정 화가로 '소화(疎畵)의 체'라는 서화일치의 화체를 확립했으며 육조풍(六朝風)의 화려·섬세한 필치로 단숨에 그림을 그렸는데 백묘(白描)의 벽화 등이 이 경향을 대표한다.

산수화의 시조로 불릴 정도로 사람·동물 ·대전(臺殿)·초목 등 모든 면에 걸친 묘법을 완성하는 등 동양화에 큰 영향을 끼쳐 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과 초성(草聖) 장지(張芝),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시성(詩聖) 두보(杜甫)과 함께 중국 6대 성인 중의 한사람인 화성(畵聖)으로 불렸다.

중국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를 쓴 장언원(815∼875)은 오도자(吳道子, ?∼792)를 "뜻이 그림에 있지 않아 그림을 얻었다"고 평했는데 이는 '인(仁)과 의(義) 같은 도덕을 끊어야 백성이 편하다'는 노자의 사상과 너무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