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예
조선 시대 초엽의 서예는 고려 말의 경향이 그대로 계승되어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체가 유행하였다. 송설체로 된 증도가(證道歌) ·천자문(千字文) ·적벽부(赤壁賦) 등이 왕부의 명령으로 간행되어 일반에게 전습(傳習)되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의 자법(字法)이 해정(楷整)하지 못하였다 하여 왕희지체로서 궤범(軌範)을 삼게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양체가 안행(雁行)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송설체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중망(衆望)을 한몸에 모은 예원(藝苑)의 중심 인물이었고, 당시의 최고 화가인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跋文)은 30세라는 약년(若年)의 서(書)이나 호매(豪邁) 늠늠하고 품위 또한 높다. 따라서 당시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선조(宣祖) 이전에 서명(書名) 높은 사람으로는 강희안(姜希顔) ·김종직(金宗直) ·정난종(鄭蘭宗) ·소세양(蘇世讓) ·김구(金絿) ·성수침(成守琛) ·이황(李滉) ·양사언(楊士彦) ·성혼(成渾) 등이 있다. 대체로 조선 전기는 조맹부 ·왕희지 이외에도 명나라 문징명 ·축윤명의 서풍도 들어와 혼류(混流)되어 행하여졌다. 성종(成宗) 때의 권발(權撥)은 수윤(秀潤)한 행 ·초서의 대가로 초서는 조선 시대를 통하여서도 가장 뛰어났다.
선조(宣祖) 때에 한호(韓濩)가 나온 후로는 조선 시대의 서풍이 크게 변모하였다. 즉 한호는 한국 서예사상 매우 이름 높은 사람으로 진체(晉體:왕희지풍의 체)를 연수한 듯하며 적공(積功)하여 해 ·행 ·초서에 능하였으나 누기(陋氣) ·속기(俗氣)가 많았다.
그 후에는 삼대가(三大家)라 불리는 백하(白下) 윤순(尹淳)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있으며, 미불(米低 ) 의 영향이 크다. 이광사는 주로 초서가 많이 남아 있는데 필력이 매우 주경하나 숙서(熟書)이며 저서로 《원교서결(圓敎書訣)》이 있다.
강세황은 서화겸선(書畵兼善)하였고 품위가 있으며 특히 세행(細行)이 우수하다. 엄밀히 말하면 삼자(三者)가 모두 비슷한 서풍이라 하겠다. 또 서명이 있는 송하옹(松下翁) 조윤형(曺允亨)이 있고 이들은 백하풍이다. 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청수(淸秀) 주경한 서풍으로 품격이 높다.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있는데, 조광진은 예서에서 볼 만한 것이 있고 이삼만은 호남(湖南)에서 특히 이름이 높다.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시 ·서 ·화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어졌고, 특히 행서는 아윤(雅潤) ·청순(淸淳)하여 품격이 높으며 자하체(紫霞體)로 알려져 있다.
추사(秋史:阮堂) 김정희(金正喜)는 재학(才學)이 뛰어났으며 당시 청나라에서 성행한 금석학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이고도 기발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금석학자로서 매우 이름 높다. 또 노석(老石) 이하응(李昰應:흥선대원군)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향수(香壽) 정학교(丁學敎)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석운(石雲) 권동수(權東壽) ·비산(比山) 배전(裵琮) ·백송(白松) 지창한(池昌翰) 등이 유명하며 이들의 필적은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V. 서체
서예는 광의로는 세계 각국에서 쓰이는 글씨의 표현 형식을 말하나 보통 한자 및 한글의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 등의 형태를 말한다. 글씨 비슷한 것이 나타난 것은 중국의 황하 문명기로 황제(黃帝) 시대의 사관(史官)이 새나 나뭇가지 등과 닮은 글자를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하나 이것은 글자라기보다 부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후 은(殷)시대에 은문(殷文:갑골문이라고도 하며 거북의 등뼈나 짐승의 뼈에 예리한 기구로 새긴 글자)과 주(周)시대에 주문(周文)이 나타나 글자다운 체재(體裁)가 생겼다. 종정고문(鐘鼎古文)이라고도 부르며 종(鐘)이나 세발솥 등에 붓으로 써서 파낸 것이었다. 다시 동주대(東周代)에는 돌에 새겨진 석고문(石鼓文)이 나타나지만 선왕(宣王)시대에 사주(史姝)가 만든 대전(大篆)이란 자서(字書)에 이 글자의 형식이 사용되었으므로 대전 또는 주문(姝文)이라고 불린다.
이 대전을 필사(筆寫)하기 편리하게 점획(點劃)을 단정한 모양으로 한 것이 소전(小篆:篆書)으로 진(秦)나라의 이사가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이어서 이 시대에 진시황제에게 죄를 지은 정막(程邈)이 옥중에서 대전 ·소전을 다시 간략화한 글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예서(隷書:古隷)로 여기에서 서체는 일단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한의 초기에는 유덕승(劉德昇)에 의해 행서(行書)가 만들어졌고, 후한 말기에는 해서(楷書)도 생겼으며, 이 해서 ·행서 ·초서의 3체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기본적인 서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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