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예

눌인 조광진

 

 

 

 

거기에 조선조의 명 서예가 중 한 사람인 눌인 조광진(訥人 曺匡振:1772~1840)의 생생한 이야기가 유재건(劉在建: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빌어 전설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의석(宜石) 김응근(金鷹根 : 1793~1863)이 평안감사로 있을 때 눌인의 큰 글씨를 시험해보고자 했다. 연광정에다 그 정자 넓이만 하게 두어 아름(束)의 종이를 이어 붙이니 그 종이 넓이가 30칸은 되었다. 거기에 글씨를 쓸 붓을 따로 만드니 붓대가 절굿공이만하였고 그 붓에 먹을 적시니 붓의 굵기가 거의 소의 허리만 하였다.

난풍재방요 / 곡성다온순
23 × 102cm × 2

눌인이 옷을 벗어 던지고 글씨를 쓰는데, 먼저 큰 새끼를 가져다가 붓대에 동여매어 그 붓을 어깨 위에 걸어 메고는 쟁기를 갈 듯 큰 걸음으로 걸어다니며 글씨를 써가니 마치 개미가 쟁반 위를 다니는 것 같았다.(중략) 그때 눌인이 쓴 글자가 ‘익(翼)’자와 ‘전(戰)’자였는데, 이때 구경꾼들이 정자 난간에 서서 내려다보면서도 글씨가 하도 커서 잘 썼나 못 썼나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50보 밖에 걸어놓고 보니 그 뛰어난 짜임새에 놀라 김응근이 감탄해 이렇게 말했단다.

전자는 짧고 익자는 길게 생겼는데 걸어다니며 쓰면서도 자획이 성기고 달라붙는 것이 저토록 잘 어울린다.” 눌인과 농인의 아호 눌(訥)과 농(農)은 ‘어눌함’과 ‘토속성’으로 비슷한 이미지를 준다. 그런가 하면 덧붙인 인(人)자는 아예 같다. 눌인과 농인이 시공을 뛰어넘어 어떤 교통이 있었을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천년을 변치 않는 먹빛보다 강하게 새겨졌을 눌인의 대자(大字)를 연상하면서, 암벽인 듯 버티고 설 농인의 큰 글자를 감상하는 현대판 평안감사(?)가 되어봄은 어떨지.

'서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예가 열전 퇴계 이황  (0) 2006.11.16
눌인 조광진 약력  (0) 2006.11.15
[스크랩] 秋史와 그 書派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0) 2006.11.15
눌인 조광진 - 평양에서 날리다.  (0) 2006.11.15
눌인 조광진  (0) 2006.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