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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50회)명량대첩 미스테리 /김세곤·호남 역사연구원장

 

 

세계 해전사 보기드문 특이한 전투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50회)명량대첩 미스테리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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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5.02.05 14:36

이순신 “승리는 천행”

 

300m철쇄 설치 허구

 

거북선도 참전 안해

 

강강술래 사실 가능

 

 

명량대첩은 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이다. 이 해전은 양치기 소년 다윗이 작은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싸움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적었듯이 이는 천행(天幸)이었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이처럼 명량대첩은 객관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과 다른 허구적 내용들이 덧붙여졌다. 더구나 TV 드라마나 영화는 흥미 위주로 허구적 요소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사실(fact)에 충실해야 한다.

명량대첩은 철쇄를 설치했다느니, 거북선이 참전했느니, 여인들이 군복을 입고 강강술래를 하였느니 등 미스터리가 많다. 이들 미스터리에 대하여 살펴보자. 

첫 번째 미스터리는 철쇄 설치이다. 이는 명량해협 300여m를 철쇄로 설치하여 왜선이 좌초되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명량해협의 가장 좁은 양편에 철쇄를 걸어 일본 전선 수백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철쇄 설치는 사실이 아니다. 철쇄 설치가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 명량해전 당시나 이후의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난중일기』나 『선조실록』, 그리고 『이충무공전서』등에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둘째, 철쇄설은 18세기 후기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와 『호남절의록』과 일본의 문헌에 나오는데 누가 보더라고 허무맹랑한 글이다. 

먼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1691-1756)이 1751년(영조 27년)에 저술한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팔도총론(八道總論) 전라도 편’을 읽어보자.

「임진년에 왜적의 승려 현소가 평양에 와서 의주 행재소에 편지를 보내 “수군 10만 명이 또 서해로 오면 마땅히 수륙으로 함께 진격할 터인데, 대왕의 수레는 장차 어디로 갈 것입니까?” 하였다.

이때 왜적의 수군이 남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던 참이었다. 그 때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 위에 머물면서 쇠사슬을 만들어 돌맥 다리에 가로질러 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적의 전선이 다리 위에 와서는 사슬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낮은 곳이 보이지 않으므로 거꾸로 덮어진 것은 보지 못하고 다리를 넘어 순류에 바로 내려간 줄로 짐작하다가, 모두 거꾸로 엎어져 버렸다. 또 다리 가까이엔 물살이 더욱 급하여 배가 급류에 휩싸여 들면 돌아 나갈 틈이 없으므로 500여 척이나 되는 왜선들이 모두 일시에 침몰했고 갑옷 한 벌도 남지 않았다.

그때 심유경은 왜적의 사신을 꾀어서 평양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였다. 왜적은 수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함께 북상할 계획이었으므로, 거짓으로 약속을 지키는 척 하면서 후일을 기다렸던 것이나 수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여송이 양쪽에서 서로 속이는 틈을 타 왜적을 격파하였으니 이것은 천운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왜적의 전선을 바다 가운데 엎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수십 일이 되지 않아 왜적의 수군이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략)

그런즉 이여송이 평양에서 전승한 공은 바로 이순신의 힘이었다. 

(이중환 지음 · 이익성 옮김, 택리지, 을유문화사, 2002. p 87-88)

이를 보면 이중환은 이순신의 명량해전을 정유년(1597년)이 아닌 임진년(1592년)에 일어난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는 명량대첩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치명적 실수를 한 것이다. 

더구나 명량은 길이 1.3km, 입구 쪽의 폭은 약 650m이며 가장 좁은 폭이 295m인데 여기에 쇠사슬이 설치되었다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하고, 500여 척의 왜선이 모두 침몰했다(실제로 왜선 133척 중 31척이 침몰했다.)는 이중환의  『택리지』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다음은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의 7대손 고정헌이 1800년에 편집 간행한 『호남절의록』에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헤라클레스처럼 명량해협을 가로지르는 철쇄를 혼자서 자유롭게 걸고 거두었다고 되어 있다.

“김억추는 정유재란 때 전라우수사가 되었는데 충무공이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자는 뜻의 격문을 공에게 보내오니 공은 즉시 진도에 가서 만나 여러 방략들을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쇠사슬을 명량에 가로질러 설치하여 우리 배가 지날 때는 거두고 적의 배가 지날 때는 걸도록 하였는데 쇠사슬이 너무 무거 지라 여러 장수들 중 아무도 그 일을 해 낼 수가 없었다. 공이 때에 맞춰 걸고 거두는 것을 아주 쉽게 하였으므로 이순신이 그 용력의 절륜함에 탄복하였다. (...) 또 쇠사슬을 걸어   길을 막으니 떠다니는 시체가 바다를 가득 덮어 마침내 대첩을 이루었다. ” (김동수 역.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p 197)

호남절의록을 읽어보면 김억추는 자유자재로 철쇄를 걸고 거두는 용력을 가졌다. 마치 헤라클레스를 연상케 한다. 또한 김억추는 9월 8일에 전라우수사로 부임하였는데 부임 후 7일 만에 철쇄를 설치했다는 것도 소설 같다. 

반면 이순신은 김억추에 대하여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9월 8일의 『난중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고 장수를 맡길 수 없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친밀한 사이라고 하여 함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래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셋째, 일본도 명량해전에서 패전한 것이 철쇄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892년에 세키 코세이는 일본 육군 장교들이 보는 소책자 ‘조선 이순신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일본 수군은 원균을 격파하고 나서 전라도 바다에 진출한 다음 충청과 경기를 치고자 하였다. 9월 16일에 선봉 간 마사카게는 함선 200여 척을 이끌고 명량도로 나아갔다. 이순신은 명량도 입구의 석량에 철쇄를 걸쳐두고 기다렸다. 간 마사카게의 선봉이 철쇄 위를 통과할 때 철쇄를 끌어 당겨 배를 전복시켰다. 뒤를 따르던 배들은 앞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 노의 방향을 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바닷물의 흐름이 빨라 배를 돌리지 못해 명량도 입구에서 일시에 전복된 배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 틈을 타고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화포를 쏘아대는 한편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 수군은 크게 패하였으며, 간 마사카게는 전사했다. 이순신의 군대는 크게 위용을 떨쳤다.” (사토 데스타로외,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2019, p 84-86)

그런데 철쇄설은 일본이 이순신의 전함 13척에 패전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핑계에 불과하다. 

셋째, 당시 조선 수군은 철쇄를 설치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 함대는 8월 16일 이후 일본의 추격을 피해 여러 번 진을 옮겨, 8월 29일 벽파진에 주둔했는데 이때도 왜군의 공격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양의 철을 주조하여 쇠사슬을 만들고 물살 센 해협에 설치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철쇄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본거지인 여수 돌산 앞바다에 철쇄를 설치한 것을 예로 들면서, 전라우수영에도 철쇄를 걸었을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전라좌수영의 철쇄는 항만 방어용이었고, 명량의 철쇄는 전투용이다. 아울러 여수와 명량은 물살의 속도와 해협의 폭 등이 달라서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다.

또한 최근에 공학적으로 명량해협에 철쇄를 거는 것이 가능한 지를 여러 가지 각도로 검증한 결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학위논문도 발표된 바 있다.(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p 346-349).

두 번째 미스터리는 거북선 참전 여부이다. 명량해전에 거북선이 참전한 것에 대한 언급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에 나온다.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니 전선이라고는 단지 10척 뿐이었다. 공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서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거북선 모양으로 꾸며서 군사의 위세를 돋우도록 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상당히 의심이 간다. 거북선이 참전하였다면 ‘난중일기’에 반드시 언급이 있었을 것인데 ‘난중일기’에 거북선 단어는 아예 없다. 더구나 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명량해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이울러 거북선을 한 달 만에 만드는 일이 가능했을지도 의문이다. 

한편 영화 『명량』에서는 거북선이 건조 중에 불탄 것으로 처리되었는데,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거북선은 참전하지 않았다.

세 번째 미스터리는 ‘강강술래’이다. ‘강강술래’는 해남·진도·완도 등 전남 서남해안 지방에서 추석날 밤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민속놀이이다.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강술래’는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이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차림으로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옥매산은 해남군 문내면과 황산면의 경계에 있고, 앞 바다가 명량해전의 무대이다. 옥매산에서 내려다보면 울돌목, 벽파진, 어란진 등이 모두 보인다.

명량해전은 참으로 세계 해전사에 보기 드문 특이한 전투이다. 다른 해전과는 달리 해남과 진도의 산봉우리에서 전라도 연안 백성들이 전투를 지켜보았다. ‘이충무공 행록’에는 그날 피난민들이 높은 산봉우리에서 전투를 바라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300척 이상 되는 왜선에 놀라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조금 있다가 조선 함대가 잘 버티자 힘껏 응원을 하였고, 왜선이 격침되자 더욱 흥분하여 소리쳤으며 왜군이 물러나자 얼싸안고 환호하였다. 

그렇다면 강강술래는 설화가 아니라 사실일 수 있다. 여인들이 두려움을 떨치기 위하여 서로 손을 잡고 술래를 돌았고, 만약 왜군이 쳐들어오면 피난 갈 것을 대비하여 치마보다는 남복을 입었으리라. 

아무튼 명량해전은 전력(戰力)으로는 조선 함대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기에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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