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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의 임진왜란 흔적]-아리타의 도조(陶祖) 이삼평 (2)

 

[일본의 임진왜란 흔적]-아리타의 도조(陶祖) 이삼평 (2)

 

  •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4.04.2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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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가현 아리타 도산신사 도리이에서 계단을 조금 오르니 도산신사가 나온다.
여기에도 도리이가 또 하나 있다. ‘도산사’라고 적힌 도리이는 청화백자 무늬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일본 유일의 백자 도리이일 것이다.
이 도리이는 1888년 10월 히에코바 마을의 유지들이 기증한 것인데 1956년 태풍으로 무너졌다가 1960년에 복구했다 한다.

또한 도산 신사 앞에는 청화 백자로 된 등(燈)이 두 개 있다. 역시 도자기 신을 모신 신사답다.

일어와 영어로 된 도산신사 안내판을 읽었다.
“도산신사는 1658년 8월에 세워진 신사이다. 원래는 인근의 이마리의 하치만(八판宮) 궁에서 주재 신인 오진왕의 영을 옮겨 신사를 세우고 아리타 하치만 궁이라 했다. 그러다 메이지 시대 후에 도산신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사가번의 초대 번주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도조(陶祖) 이삼평을 모셨다. 1917년에 아리타 요업 300주년을 맞아 도산신사 능선 자락에 ‘도조 이삼평 비’를 세웠다.”

 도산신사 안내판

도산신사 위에는 ‘도산사’라고 적힌 접시와 여러 개의 접시가 있다.

도산사

도산신사를 지나 오르막 길을 올랐다. 돌아보면서 다시 도산신사를 촬영하였다.

오르막 길에서 촬영한 도산신사

언덕길로 4-5분 올라가니 길목에 ‘도산시비’, ‘도조 이삼평비·도산 시비 안내비, 그리고 ’도조 이삼평비 안내비’가 연이어 있다.

이삼평 관련 비 3개

먼저 ‘도조 이삼평 비·도산 시비 안내비’부터 보았다. 비는 일본어, 영어 그리고 한글로 되어 있다.

도조 이삼평비·도산 시비 안내비

‘도조 이삼평 비’부터 읽는다.
“1616년경, 고려의 도공 이삼평은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자석광을 발견하여, 아리타의 시라카와(白川)에서 일본 최초의 도자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1917년 아리타 도자기 창업 300년을 기념해서 「도조 이삼평비」가 건립되었고, 그 후 매년 5월 4일이면 이곳에서 도조제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아리타는 일본 도자기의 출발점이다. 도자기의 시조로 알려진 이삼평은 임진왜란때 사가현 번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끌려와서 아리타의 도자기 가마의 책임자로 임명받았고 ‘가나가에 신페이’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그는 도자기 생산에 적합한 흙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1616년에 아리타 동쪽 이즈미야마에서 양질의 백토 광산을 발견하여, 광산 건너편 시라가와(백천) 계곡에 가마를 열어 일본 최초로 백자를 생산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각지에서 도자기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자기 마을 아리타가 번성했다.

영주 나베시마는 이삼평의 공로를 치하하였고, 당시 아리타 마을을 다스리던 다쿠 야스토시는 자신의 하녀를 이삼평과 결혼시켰다.

이 후 이삼평은 가네가에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고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아리타에 정착하였다. 에도 후기에 아리타 도자기는 일본 제일로 손꼽였고, 이마리와 나가사키 등을 통해 유럽 전역에 수출되어 규슈의 근대화는 물론, 일본의 자본 형성및 축적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조용준 지음, 일본 도자기여행 - 규슈의 7개 가마, 2016, p 24)

1913년에 이삼평은 일본 이름인 가나가에 산페이 대신에 이삼평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이는 히젠 도업계에서 결정한 것이었는데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여 헌병통치를 하였다. 이런 판국에 아리타에서는 가나가에란 일본 이름 대신 이삼평이라고 한글 이름으로 칭송하였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또한 1917년부터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5일간 아리타 도자기 축제가 열리고 5월 4일에는 도자기의 번영을 기원하는 도조제(陶祖祭)가 개최되고 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1 규슈, p 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