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 “조선 사람 전부 없애 일본인 이주시켜라”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31회)선조, 이순신을 불신하다/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이순신 제거후 조선수군 궤멸
전라도부터 공격… 모두 죽여”
1596년 9월 초에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파탄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사분란하게 조선 재침략 작전을 진행한다.
군대를 1번 대에서 8번대로 편성하고 12만 1000명을 동원하였다. 여기에는 부산 일대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명 왜군도 합류시켰다. 부대는 1군이 가토 기요사마 1만 명, 2군이 고니시 유키나가 1만4700명, 3군 구로다 나가마사 1만 명, 4군 나배시마 나오시케 1만2000명, 5군 시마즈 요시히로 1만 명, 6군 조소가베 모도지가 1만3300명, 7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1만1000명, 8군 모리 데루토모, 우키다 히데이에 4만 명 등 도합 12만 1000명이었다.
히데요시는 재침략을 준비하면서 1592년부터 1596년까지 5년간의 전쟁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 결과 조선 침략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첫째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점, 둘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양곡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점이 주된 요인으로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치밀하게 재침략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는 맨 먼저 이순신을 제거한 후에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것, 전라도부터 공격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군인과 양민 및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 명나라 군대가 나오면 즉시 보고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년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 사람들을 전부 죽여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다음 서도(일본의 서쪽)의 사람들을 옮겨 조선에 살게 하고, 동도의 사람들을 옮겨 서도에 살게 하면 10년 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포고문)
한편 일본이 재침할 것이라는 황신의 보고를 받은 조정은 시급히 대책을 마련한다. 급히 선전관을 경기·충청도에 보내어 왜적과 대항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동시에 방어사 고언백을 경상도에 급히 보냈다. 또한 예조정랑 정염을 명나라에 보내어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
# 1597년(정유년) 1월 중순에 일본이 조선을 재침략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었다. 가장 먼저 왜군은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왜군은 선조가 이순신을 신임하지 않고 있고, 조선 조정이 전쟁 중에도 동인과 서인 간에 당쟁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가 좋지 않은 점 등을 간파하고 이순신을 제거할 반간계를 쓴다.
왜장 고니시는 통역관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중에 보내어 밀서를 전달한다. 요시라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하인데 김응서와는 1595년 봄부터 밀접한 접촉이 있는 이중간첩이었다.
“이번에 강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가토 탓이다. 고니시는 가토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 가토가 며칠 뒤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니 조선 수군이 가토를 해상에서 없애면 좋겠다. 이러면 조선의 원수도 갚고 고니시의 마음도 좋으리라.”
1월 11일에 요시라로 부터 고니시의 밀서를 받은 김응서는 밀서 내용 그대로 급히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1월 19일에 김응서의 장계를 본 선조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윤근수 등 조정대신들의 주장을 좇아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1월 21일에 경상도위무사 황신은 한산도에 가서 이순신에게 어명을 전달하고 즉시 출정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출전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그런데 가토 기요사마(가등청정)는 이미 1월 13일에 전선 130척을 이끌고 다대포에 도착한 상태였다.
(1월 14일에는 고니시 군대가 두모포 등 여러 포구에 진입하였다.)
1차 간계에 실패한 일본 측은 다시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가 이미 거제도에 도착하였다는 사실과 이순신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으니 원망스럽다는 말을 전한다. 고니시가 매우 통분해 하면서 ‘그대 나라 일은 매양 그러하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가토가 이미 바다를 건너 왔으니, 전날 내가 한 말이 가토의 귀에 들어갈까 걱정된다. 모든 일을 비밀로 하자’ 라고 말하였다는 사실도 전달한다. 이 또한 왜군의 제2차 이순신 제거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철썩같이 믿은 김응서는 다시 1월 17일에 조정에 아뢴다. 김응서는 참 한심한 인물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싸움을 하는 사람인가.
1월 23일에 조정은 김응서의 보고를 접한다. 이 때 조정은 1월 21일 도체찰사 이원익, 1월 23일 황신의 보고를 통하여 가토가 이미 부산 다대포에 도착하였음을 알고 있었다. 특히 선조는 황신의 장계를 읽고 매우 분노하였다.
1597년 1월 23일자 ‘선조실록’을 읽어 보자.
경상도 위무사 황신이 장계에, “당일에 우병영의 아병(牙兵) 송충인이 부산에서 돌아와서 ‘이달 12일에 가토의 관하 왜선 1백 50여 척이 일시에 바다를 건너와 서생포에 정박했고, 13일에는 가토가 거느리는 왜선 1백 30여 척이 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는데 바람이 순하지 못하여 가덕도에 이르러 정박했다가 14일에 다대포로 옮겨 정박해 있는데 곧 서생포로 향한다고 한다. 고니시는 송충인을 불러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나 이 뒤에도 할 일이 있다라고 말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수군이 차단하는 계책이 진실로 좋은 계책인데, 우리의 조치가 기일에 미치지 못하여 일의 기회를 그르쳤으니 매우 통한스럽습니다.”
선조는 조선 수군이 가토를 잡지 못한 탓을 이순신에게 돌렸고 조선 수군이 출동하였다면 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1월 23일에 선조는 별전에 나아가 대신및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 중 이순신 관련 부분을 읽어보자.
이산해 : “요즘 와서 수군에 힘을 넣으면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 충청도에서 마침 원균을 만났는데, 원균이 말하기를 ‘왜적을 무서워할 게 무엇인가?’ 하기에 신은 처음 듣고는 망령되다 여겼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수군을 믿고 그런 말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조: “왜장 고니시(고니시는 김응서에게 가토를 도모할 계책을 일러주었는데, 유성룡 등이 왜적의 말을 듣다가 그들의 계책에 빠질까 싶다며 경솔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다.)가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야말로 정말 천하에 용렬한 나라이다. 오늘 장계를 보니 고니시 역시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 한다. 이렇게 조롱당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는 고니시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을 말함)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고 있다.”
윤두수 : “이순신은 왜적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로 나가 싸우기에 싫증을 낸 것입니다.”
선조 :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가토의 목을 베어 오기를 바라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 아무 일도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오늘 도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군사를 이끌고 시위하기로 약속이 이미 되어 있다고 하였더라만…”
선조: (한참동안 한탄하다가 길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이제 끝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선조는 이순신 때문에 나랏일이 그르쳤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이제 끝났다는 극언까지 한다.
그런데 선조가 이순신을 더욱 불신하게 만든 것은 1월 22일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균이 올린 장계가 한몫하였다. 원균은 장계에서 ‘우리가 믿을 것은 수군인데 수군이 나서서 선제적인 공격을 하면 왜군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균은 자기 같으면 바다에 나가서 싸우겠노라고 하면서 출전하지 않는 이순신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신이 외람되게도 무거운 책임을 맡고 남쪽 변경을 지키고 있으면서 우둔하나마 힘을 다하여 만세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건대 몸이 이미 매우 쇠약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많지 못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전하를 우러러 단지 통곡만 할 뿐입니다. (...) 그런데 수군과 육군에 대하여 말한다면, 임진년 초기에 적의 육군은 기세를 떨쳐 한 달 사이에 평양까지 침입했으나, 바다의 적들은 한 해가 지나도록 패전만 하여 끝내 남해 바다 서쪽으로는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군사 위력은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 척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가덕도 뒤에 몰래 주둔하면서 경쾌선을 골라 뽑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한편, 1백 척이나 2백 척이 큰 바다에서 위세를 보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원래 해전에서 이기지 못하여 겁을 먹고 있는 가토가 반드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바라건대 조정에서는 수군으로써 바다에 나가 싸움으로서 왜적들이 육지로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신이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신이 전에 바다를 지킨 적이 있어서 이 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감히 잠
자코 있을 수가 없어 전하에게 아룁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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