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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39)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39)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

 

1946년 새해 들어서 미군정은 인민위원회 해체작업에 들어갔다. 해방 직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준은, 미국의 남한 진주를 앞둔 194596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은 박헌영이 장악하였다. 지역의 자생조직들은 인민위원회로 바뀌었고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였으며 미군정하에서도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그런데 인민위원회를 공산당 조직망으로 인식하였던 미군정은 이들을

불법화하였고 해체와 해산 작업에 들어갔다.

 

194628일에 전라북도 전주에서는 지역인민위원이 테러단체에게 끌려가 총살된 후 반역자라는 전단과 함께 길가에 버려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214일에는 서울 청량리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의 명의로 가축세를 거두려 했다는 이유로 인민위원회 간부가 체포되었다.

 

214일에 미군정 정보처는 전라남도 나주와 영산포에서 잇달아 전개된 경찰서 탈환 작전에 대하여 보고했다.

 

나주경찰서장과 영산포 경찰서장은 조선인민공화국 계열인데 두 경찰서장은 그들이 속한 정치조직을 위해 직권을 남용해 왔습니다. 두 경찰서장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고문하고 투옥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나주경찰서장은 타지역 경찰들이 나주의 인권실태조사를 시도할 경우 조선인민공화국 계열 조직원들을 동원하여 저항하겠다는 내용의 비상

계획도 세워두고 있습니다.

 

212일에 미군정 관계자들은 광주경찰서 병력 60명을 이끌고 나주로 출동하였습니다. 나주경찰서 측은 출동한 미군 장교들을 보자 저항을 포기했고 유혈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나주경찰서장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나머지 경찰들은 현장에서 무장 해제되어 경찰서에서 쫓겨났습니다. 미군정 관계자들은 광주경찰서 병력 47명을 나주경찰서에 배치하고, 13명을 데리고 영산포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급히 정보를 입수한 영산포 경찰서장과 직원 9명 전원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동행한 13명의 광주경찰서 병력으로 하여금 영산포 경찰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달아난 인민위원회 계열 경찰서원들을 수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219일에도 미군정은 광주경찰서 병력 34명을 이끌고 영광경찰서에 출동했다. 현장에 출동한 미군 장교는 인민위원회 계열의 영광경찰서 인력 전원에 대하여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직을 남용한 책임을 물어 현장에서 파면했다. 이어 광주경찰서원 34명으로 하여금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한편 216일의 미군정 G-2 보고는 목포지방법원에서 공직을 사칭해 공권력을 행사한 혐의로 115일에 무더기로 구속 기소되었던 인민위원회, 청년동지회, 청년동맹등 33명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고 이들 가운데 14명은 유죄, 1명은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나머지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고 밝혔다. 유죄가 인정된 14명중 1명인 전 목포경찰서장에게는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고 보고했다.

 

또한 미군정 보고는 광복군을 이끌던 김원봉 장군이 최근 자신의 부하병력을 규합해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며 옛 부하였던 하동경찰서장이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전했다. 이 보고서는 김원봉이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는지의 사실 여부에 대하여는 자세한 확인이나 면밀한 분석은 하지 않고 가볍게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통하여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은 김원봉을 지원하는 하동경찰서장을 제거하려는 조치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해체와 해산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그 과정에 극우테러단체들이 가담했고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미군정은 경찰서와 행정기관을 차례차례 장악했다.

 

일제 강점기에 각 기관에서 일했던 경찰과 관리들도 자연스럽게 다시 제자리를 되찾아 갔다. 또 서북 청년단등 극우단체들 역시 경찰의 보조수단으로 그 곁에 자리잡게 되었다.

(김택곤 지음,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맥스, 2021, p 169-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