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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김세곤 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21-22) 김구,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다.

<김세곤 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21) 김구,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

 

 

19451123일에 김구·김규식·이시영·엄항섭·김상덕·장준하·유진을 비롯한 중경 임시정부 요원 환국 제115명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김구 일행은 미군 수송기를 타고 오후 4시경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고, 5시 조금 지나 서대문 경교장(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본관 건물)에 도착했다. 환영 행사도 없었고 인파도 없었다.

 

이튿날 서울신문엔 이런 기사가 나왔다.

 

김구 일행의 숙사로 되어있는 죽첨정 최창학 댁은 수일 전부터 말끔히 치워져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였다. 숙사 안팎에는 미리 들어와 있는 광복군의 일 소대가량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지난 5일 일행이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후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기다리기에 가슴을 조이던 환영준비위원회에서도 23일 오후까지도 전연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오후 다섯 시 다섯 대의 자동차가 갑자기 최창학 댁 정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순간 이 주위는 조심스러운 가운데도 몹시 바쁘고 당황해졌다. 여섯 시 방송에 뜻하지 않게 하지 중장의 발표에 의한 김구의 귀국을 전하자 서울시민들은 저으기 놀래었고 또 반가웠다.

 

행인들은 일부러 죽첨정 동양극장 앞을 지나다가 발을 멈추고 숙사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문 앞에는 엠피(MP)와 광복군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날 밤은 일체 어떠한 사람도 면회를 시키지 않기로 하고 여로의 피곤한 몸을 쉬기로 되었다. (서울신문, 19451124)

 

 

23일 정각 오후 6시에 하지 사령관의 짧은 성명이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6시 조금 지나 이승만이 찾아왔고, 뒤이어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구도 기자들과 몇 마디 문답이 있었지만 말을 몹시 아꼈고, 8시에 선전부장 엄항섭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엄항섭의 기자회견문은 이렇다.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조국의 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희생되신 유명 무명의 무수한 선열과 아울러 우리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피를 흘린 허다한 동맹국 용사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다음으로는 충성을 다하여 3천만 부모 형제자매와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미국과 소련 등 동맹군에게 위로의 뜻을 보냅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과거 2·30년간을 중국의 원조 하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우리의 공작을 전개해왔습니다. 더욱이 금번의 귀국에는 중국의 장개석 장군 이하 각계각층의 덕택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에 있는 미군 당국의 융중(隆重)한 성의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및 나의 동료는 중·(·)양군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조국의 북부를 해방해 준 소련에 대하여도 동양(同樣)의 경의를 표합니다. 금번 전쟁은 민주를 옹호하기 위하여 파시스트를 타도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승리의 유일한 원인은 동맹이라는 약속을 통하여 상호단결 협조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번 전쟁을 영도하였으며 따라서 큰 전공을 세운 미국으로도 승리의 공로를 독점하려 하지 아니하고 동맹국 전체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겸허한 미덕을 찬양하거니와 동심참여한 동맹국에 대하여도 일치하게 사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풍은 다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와 나의 동료는 각각 일개의 시민 자격으로써 귀국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받아 가지고 노력한 결국에 이와 같이 여러분과 대면하게 되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에게 벌을 주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열렬하게 환영해 주시니 감격한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나와 나의 동료는 오직 완전히 통일된 독립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가림 없이 심부름을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 속이나 물 속에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기쁘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비에트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북쪽의 동포도 기쁘게 대면할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이 날을 기다리십시다. 그리고 완전히 독립자주할 통일된 신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동분투합시다."

(자유신문, 19451124)

 

 

참고로 '경교장'은 김구가 나중에 붙인 이름이고, 당시는 죽첨장'이라 불렀다. 저택 소유자 최창학(1891~1959)은 일제시대에 많은 금광을 보유한 친일파였다. 그런데 그는 경교장 제공뿐 아니라 우익에 많은 자금을 내놓은 덕분인지, 김구가 죽은 직후인 19498월 반민특위의 불구속 조사를 받고 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김세곤 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22) 김구, 성대한 환영을 받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김구 주석은 귀국 이튿날인 1124일 오후에 서울방송국을 통해 귀국 소감을 밝혔다. 그는 혼이 왔는지 육체가 왔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 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무르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경성에 도착되었습니다. 나와 나의 각원(閣員) 일동은 일개 평민의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 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로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료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자유신문 19451126)

 

하지 사령관은 김구를 고깃국에 필요한 소금처럼 대접을 제법 극진히 했다. 김구를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1124일의 기자회견장에서 하지는 김구를 조선을 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추겨 세웠다.

 

미군정은 덕수궁에 임시정부의 본부를 마련해 주고, 미군 헌병이 경비를 서게 하였으며, 교통수단을 제공하였다. 다른 단체에 대하여는 무기 반납을 명령하였지만, 김구의 개인 수행원들이 무기를 지니는 것을 허용했다. 또 미군정은 인공에게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 못하게 한 것과는 달리, 임정에게는 정부또는 내각이라는 단어 사용을 허용했다.

 

121일 서울운동장에서 임정 환국을 축하하는 환영회가 3만여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오세창은 갈망하던 임시정부 간부가 환국하였으니 이 지도자(김구)의 명령에 절대복종하자.”는 개회사를 하였다.

 

김구는 자신에 대한 성대한 환영에 흡족해 하면서 그 감격을 이렇게 기록했다.

 

국내에서 환영 선풍이 일어나자 군정청 소속 기관과 정당 · 사회단체며 교육·교회·공장 등 각종 부문이 쉴 틈 없이 연합환영회를 조직하였다.

나 자신과 우리 일행은 개인 형식으로 입국하였지만, 국내 동포들이 정식으로 임시정부 환영회라고 크게 쓴 글씨를 태극기와 아울러 창공에 휘날리고 일대 성황리에 시위 행렬을 진행하니, 만 리 해외에서 풍상을 겪은 온갖 고통을 동정하는 듯 싶었다. 행렬을 마친 후 덕수궁에서 연회가 열렸는데 그 성황은 참으로 찬란하였다. 서울기생은 총출동하여 400명 이상이요, 식탁이 400여 개며, 이루다 기록하기 어려울 만큼의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 중장을 비롯하여 미군정 간부들과 참석한 동포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덕수궁 광장이 비좁을 지경이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 p 125-126)

 

임정 요인 1진이 귀국한 지 열흘 후인 122일에 상해에 남아 있던

김원봉·홍진·김성숙·신익희·조소앙·조완구 등 임시정부 요인 222명이 귀국하였다. 2진은 121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2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이 탄 비행기는 폭설이 내려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지도 못하고 저녁 무렵 군산 비행장에 내렸다. 이곳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다가 논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대전 유성에서 비행기를 타고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1진과는 달리 2진에 대한 미군정의 대우는 형편없었다.

 

126일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경교장에 모였다. 1진과 제2진으로 귀국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원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참석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이날의 모임을 환국 후 전 각료가 모여 첫 국무회의를 열었다.”고 크게 보도하였다. 국무회의는 국내정세에 대한 보고를 듣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의 갈등으로 한가지 안건도 상정하지 못하고 산회되고 말았다. (강준만 저, 위 책, p 132-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