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
- 19회 이치와 웅치 그리고 금산전투 등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이치전투
1592년 7월 초에 고바야카와의 왜군 제6군 1만 6천 명은 전라도 점령을 시도했다.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군은 진안의 웅치(熊峙)를 넘고, 북군은 금산의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키로 했다. 한편 조선군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웅치를 지키고,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치에 버티고 있었다.
한산해전이 일어난 7월 8일에 이치와 웅치에서 전투가 동시에 일어났다. 권율과 황진이 지휘하는 1천 5백 명의 군대는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수천 명의 왜군을 이치 전투에서 물리쳤다.
6월 6일에 전라·경상·충청 3도 근왕군 5만 명이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의 왜군에게 어이없이 패배했다. 중위장으로 참전했다가 광주로 돌아온 광주목사 권율은 의병 모집 격문을 붙이고 1천 5백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후 권율은 이치에서 동복현감(화순군 동복면) 황진의 부대와 합세했다. 7월 8일 새벽에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 수천 명이 공격을 개시했다. 왜적은 조총을 쏘아대고 칼과 창을 번쩍이며 산 정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아군은 적을 철저히 막았다. 특히 선봉장 황진의 활 솜씨는 백발백중이었다. 이러자 왜적은 패하여 물러났다. 그런데 황진이 물러나는 왜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졌고, 왜적이 다시 정상으로 기어올랐다.
총사령관 권율은 군사들을 직접 독려해 싸웠다. 밀고 밀리는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왜적은 조선군의 사기를 꺾지는 못하였고, 금산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왜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시체는 이치 골짜기에 가득했다. 조선군의 승리였다. 완패한 일본은 이치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 중 첫째로 쳤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
한편 17세의 의병 정충신은 승전보를 의주 행재소에 알렸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은 선조에게 낭보를 전했고 권율은 나주목사로, 황진은 익산군수로 승진했다. 이항복 밑에서 일한 정충신은 무과에 급제해 1624년에는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광주 금남로는 정충신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사진 1 금산이치대첩지
사진 2 금산이치대첩지 안내문
사진 3 대첩비문
사진 4 대첩비각
사진 5 대첩비각 안내문
사진 6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
사진 7 충장사
# 웅치 전투
이치 전투가 일어난 같은 날(7월 8일)에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의 관군과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혼성군 1천 명이 웅치에서 안코쿠지 에케이의 왜군 수천 명과 싸웠다. 이들은 목책을 세워 산길을 막고 군사들을 격려하여 종일 싸웠다. 이 싸움에서 정담 ·이복남 ·황박 등은 적병을 수없이 활로 쏘아 죽이지 적들이 물러섰다. 그런데 날이 저물고 화살마저 떨어졌을 때 왜군들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러자 이복남과 황박의 군사는 퇴각하였고, 김제군수 정담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음 날인 7월 9일에 안코쿠지는 전주 안덕원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퇴각한 이복남이 포진하고 있었고, 전주성에는 전 전적(前 典籍) 이정란이 낮에는 깃발을 잔뜩 세우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더구나 합류키로 한 고바야카와 부대가 나타나지 않아 왜군은 철수하고 말았다.
그런데 왜군은 물러나면서 웅치에서 죽은 조선군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큰 무덤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국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자들에게 조의를 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쓴 팻말을 세웠다. 적군이지만 치열하게 싸운 정신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유성룡 지음·이민수 옮김, 징비록, p 165-166)
# 금산전투
7월 9일에 6천 명의 고경명 의병은 방어사 곽영의 관군 1천 명과 함께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치고 작전을 개시했다. 고경명은 정예기병 수백 명을 내보내어 적을 공격했는데, 군관 김정욱이 말에서 떨어져 달아나자 우리 군사가 일시 후퇴했다. 석양 무렵에 왜군이 성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은 재인(才人) 30여명을 시켜 성문을 부수게 하는 한편 진천뢰를 쏘아 성안의 창고를 불태웠다.
날이 저물자, 양쪽은 각기 군사를 거두었고, 의병과 관군은 내일 같이 싸우기로 약속했다.
7월 10일 동틀 녘에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그런데 왜장 고바야카와는 관군이 약한 것을 미리 알고 관군을 총공격했다.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도망치자 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고경명은 의병만이라도 적과 대항코자 하였으나 몇 사람이 ‘방어사의 군사가 무너졌다’고 부르짖자 의병도 동요해 도망가 버렸다.
이때 고경명 유팽로 안영이 전사했다.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도 싸우다가 죽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
한편 고경명 순절 이후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화순에서 최경회의 전라우의병, 보성에서 박광전·임계영의 전라좌의병, 장성에서 김경수의 장성남문 의병, 영광 심우신, 남원 변사정, 태인 민여운 등이 일어났고, 고종후는 복수의병장이 됐다.
# 조헌의 청주성 수복과 금산 전투 순절
조헌은 옥천에서 의병 1,600명을 모았다. 8월 1일에 그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의승(義僧) 영규의 1천 명, 방어사 이옥의 관군 5백명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다. 조헌은 왜적이 전라도를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백 명만 남았고, 영규가 이끄는 의승 6백 명이 합세했다.
8월 18일 새벽,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적은 3대로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공격해 왔다. 조헌은 들판에서 왜군의 세 번 공격을 세 번 다 무찔렀다. 의병들은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일어나 화살이 다하면 칼과 창을 잡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로 치는 처참한 육박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해 질 무렵에 의병은 왜적의 총공격에 무너졌다. 부하들이 조헌에게 탈출을 권유하였으나,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요.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싸우다가 죽었다. 영규 대사도 ‘생사(生死)의 명(命)은 재천(在天)이다. 다만 의를 좇아 죽을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
의병과 승병 1,300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가 모두 순절했다. 왜적은 조헌 등의 군사를 패배시키기는 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군사가 많았고 관군이 잇따라 공격할 것을 우려해 밤에 도망했다. 그리하여 전라도가 다시 온전하게 됐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15번째 기사).
사진 8 칠백의총 안내판
사진 9 칠백의총
사진 10 종용사
사진 11 기념관
사진 12 기념관 안내판
사진 13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
사진 14 순의비 안내판
# 명군의 평양성 공격 패전
1592년 7월 17일 요동 부총병 조승훈 ·유격 사유 등이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머물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패하였다.
그런데 조승훈은 명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것은 조선의 군사 일부가 왜군에 투항했기 때문이라고 무고하는 등 패전의 책임을 조선 측에 전가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심희수·윤두수 등을 요동 총병 양소훈 진영에 파견하여 적극 해명하는 동시에 평양성을 다시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는 파병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한편 조승훈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뒤 명나라의 충격은 매우 컸다. 당시 명의 국내 사정은 임진왜란 이외에도 삭녕의 변이라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에 명나라는 병부우시랑 송응창(1536∽1606)을 경략방해비왜군무(經略防海備倭軍務 약칭 ‘경략’)로 임명하고, 산동·요동·통주 등 12개 도에 총동원령을 내려 왜군 침략에 대한 철저한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 영천성과 경주성 탈환
7월 들어 경상좌도 의병의 반격이 본격화되었다. 7월 28일에 의병장 권응수가 영천성을 탈환하였고 9월에는 경상좌병사 박진이 경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먼저 영천성 탈환이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막하에 있던 별장 권응수는 고향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 활동을 하다가 연합의병장이 되어 정대임·정세아·조성·신해가 이끄는 의병 4천 명과 함께 영천성을 공격했다. 제5군 후쿠시마 마사노라 소속 왜군 1천 명은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는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화공(火攻)으로 왜적을 죽이니 5백여 명이 죽고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었다. 아군 사망자는 83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자 안동 이남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이 상주로 내려갔고 경주성 탈환도 가능해졌다.
권응수가 화공(火攻)으로 영천성을 되찾는 것을 본 경상좌병사 박진은 열여섯 고을의 군사 1만여 명을 합쳐서 권응수로 선봉을 삼고 곧장 경주의 적에게 육박하였다. 그러나 적이 먼저 길 아래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전투가 한창 어우러졌을 때 뒤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이에 관군이 크게 패하여 전사한 자들이 즐비하였고 박진 등은 도망쳐서 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 기사)
9월 초에 박진은 다시 경주성 탈환에 나서 성공하였다. 1592년 9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 실려 있다.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앞서 패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안강현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조선의 비밀 병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사하여 성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무기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포(砲)가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비격진천뢰는 이런 무기가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震天雷)를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백∼6백 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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