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임진왜란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 15회 선조, 요동 망명을 꾀하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

- 15회 선조, 요동 망명을 꾀하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선조, 요동 망명을 꾀하다.

 

15925월 이후의 임진왜란 전황을 살펴보자. 5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울에 무혈입성했다. 4일에 가토 기요마사도 서울에 들어왔다. 516일에 가토로부터 서울 함락과 조선 국왕의 도망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9개 조에 걸친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는 조선 국왕을 수색하여 찾아낼 것, 조선 농민에게 군량을 징발하여 명나라 원정 준비를 든든하게 할 것, 서울에 히데요시의 거처를 준비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왜장들은 조선 전역을 재배치하고 징발한 군량을 정하였다.

 

510일에 고니시와 가토의 군대는 임진강 변에 이르렀다. 임진강에는 김명원과 이양원 그리고 한응인의 군대 13천 명이 대치중이었다. 그런데 가토의 군대는 짐짓 철수하는 척 했다. 이러자 517일에 한응인과 김명원의 군대가 가토의 군대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다. 527일에 왜군은 임진강을 건넜고 29일에 개성이 함락되었다.

611일에 선조는 도망치듯 평양을 빠져나갔고, 615일에 왜군은 평양성을 쉽게 점령했다.

 

613일에 영변에 도착한 선조는 국정 권한을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요동 망명을 결심했다. 14일에 선조는 망명 의사를 밝히는 외교문서를 명나라 요동 도사에게 보냈다.

 

그런데 618일에 요동 도사는 선조가 진짜 임금인지를 확인했다. 왜냐하면 왜군이 가짜 왕을 세워서 요동에 진입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병부도 선조가 왜적을 만나자마자 도주한 것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계속 표명했다. 결국 선조는 진짜 조선 왕인지 아닌지를 확인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622일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신하들에게 요동행을 독촉했다. 이러자 류성룡과 윤근수가 극력 말렸다. 하지만 선조는 624일에도 요동행을 재촉했다.

 

그런데 명나라가 선조가 망명하면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안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전보는 압록강 건너편 지금의 단동에 여진족을 막기위해 명이 쌓은 작은 성이었다. 이러자 선조의 망명 소동은 잠잠해졌다. (선조실록 1592626)

 

의주에서 선조는 다음 시를 지었다.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도다

조정 신하들은 이 날 이후에도

서인이니 동인이니 나뉘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선조는 당쟁 탓, 신하 탓이다. 참 한심한 임금이었다.

 

 

#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선조가 요동 망명을 시도한 가운데 각 도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영남에선 곽재우가 의령, 정인홍이 합천, 김면은 고령, 권응수가 영천에서 창의하였다. 호남은 김천일이 나주, 고경명이 광주, 유팽로가 곡성에서 창의하였고,

충청에선 조헌이 의병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이다. 422일에 거의한 곽재우는 의령 거름강(岐江) 등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을 주로 펼쳤다. 곽재우의 가장 빛나는 승전은 정암진(鼎岩津) 전투였다. 안코쿠지(安国寺恵瓊)가 이끄는 제6군 고바야카와 휘하의 별동부대 2천명이 삼가, 남원을 거쳐 전주로 들어가기 위해 의령에 도착했다.

 

안코쿠지는 정찰대를 보내 정암진 도하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두었다. 이러자 곽재우는 밤중에 나무 푯말을 늪지대로 옮겨 놓고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도하를 시작한 왜군 선봉대는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서 허둥댔고, 매복한 의병이 기습공격을 하자 왜군 주력군도 패하고 말았다.

 

이후 곽재우는 왜군을 현풍과 창녕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왜적이 주둔지에서 도망하였다.

 

호남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호남 의병은 향토방위의 영남 의병과는 달리 근왕의병이었다. 한양을 다시 찾고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창의였다. 이는 선조가 개성으로 파천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절망하자, 호종한 류성룡이 호남의 충의지사들이 머지않아 봉기할 것이라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선조수정실록 1592511번째 기사).

 

5월 초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8천 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올라갔다가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에 지금 임금의 행차가 서도로 가서 그 존망을 알 수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전주로 돌아와 버렸다.

정말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이런 이광의 처사에 격분하여 나주에 사는 전 수원부사 김천일(15371593)은 고경명(15331592)을 만나 전라도 관찰사 이광을 비판하면서 조속히 창의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고경명이 신중론을 취하자 김천일은 독자적으로 거병에 나섰다.

 

516일에 김천일은 송제민, 양산룡·양산숙 형제, 임환(백호 임제의 동생), 서정후, 이광익·이광주 등과 함께 창의하였고, 63일에 나주 의병 3백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623일에 수원에 이르자 의병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김천일의 활동은 15926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호남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부터 경기도가 완전히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붙좇아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김천일이 의병 수천명을 규합하니, 선조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김천일의 군사가 수원에 이르러 독산성에 웅거하여 적에게 붙좇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도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사진 1 나주 정렬사 입구

 

사진 2 김천일 동상(정렬사)

 

사진 3 정렬사

 

사진 4 김천일 영정

 

사진 5 김천일 묘소 안내판

 

사진 6 김천일 묘소

 

523일에 옥과 출신 성균관 학유 유팽로는 이종사촌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을 만나서 창의를 권유했다. 동래부사를 하다가 파직된 고경명은 당시에 광주 시골에 머물고 있었다. (고경명 후임 동래부사가 순절한 송상현이었다.)

 

529일에 광주, 담양, 옥과, 남원, 순창 등 21개 고을 선비들이 담양 추성관에서 모였다. 이날 고경명이 맹주에 추대됐다. 고경명은 각 지역에 창의 격문을 보냈다.

 

 

, 고경명은 문장이나 아는 졸렬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이지만, 맹주로 추대되니 여러 동지들에게 수치가 될까 두렵다.(중략)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우리 전라도 사람들이여! 아버지는 그 아들을 깨우치고 형은 그 아우를 격려하여 의병대열에 모두 함께 나서자! 속히 결정하여 옳은 길을 따르라. 주저하다가 스스로 그르치지 말라.”

 

이리하여 611일에 고경명은 6천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유팽로가 좌부장, 양대박이 우부장, 안영이 종사관이었다.

 

614일에 전주에 도착한 고경명은 관군이 임진강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자 양대박은 추가 모병을 위해 향리 남원으로 떠나고, 본진은 전주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양대박(15431592)은 남원·임실·순창 등에서 1천 명의 의병을 모았다. 남원부사 윤안성도 지원해 주었다. 625일 새벽에 양대박 의병은 임실에서 전주로 향했다. 그런데 척후병으로부터 왜군 수천 명이 임실 운암 계곡에 진을 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왜군은 전주로 향하는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부대였다. 양대박은 운암 계곡에서 아침 식사 준비 중인 왜군을 급습했다. 왜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고경명 의병 최초의 승리였다. 안타깝게도 양대박은 7월 초에 진중에서 병사(病死)했다.

 

한편 일본 수군이 연거푸 패전했다는 소식이 히데요시에게 알려졌다. 히데요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편지를 보내 용인 전투의 승리를 칭찬함과 동시에 조선 수군을 무찔러 주길 기대했다. 614일에 와키자카는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야키와 함께 부산포에 도착했다.

 

7월 들어 왜군이 수륙합동으로 전라도를 침공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일본 제6군은 금산까지 진출했고, 일본 수군도 전라도 해역을 넘보고 있었다. 이러자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계획했다.

 

 

사진 7 포충사 (광주 남구)

 

사진 8 고경명 영정

 

사진 9 봉안 신위

 

사진 10 정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