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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역사 이야기

[김세곤의 조선 역사 기행(37)]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김세곤의 조선 역사 기행(37)]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3.08.1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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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광화문 교보빌딩 앞 도로변 모서리에는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각’이 있다. 비각 오른편에는 기념비 안내판이 있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는 1903년 9월 2일에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전액(篆額)은 황태자 순종의 글씨로 ‘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頌(대한제국 대황제가 60세를 바라보게 된 것과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라고 썼다. 

원래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자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해는 1902년이었지만,  나라 형편이 어려워 한 해 늦게 세우게 되었다.”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안내판
기념비각 (안에 비가 있다.)

그런데 고종(1852 ~ 1919 재위 1863~1907)어극 40년 기념식은 무산되었다. 그 경위를 살펴보자. 

1902년 3월 19일에 고종은 즉위 40년 기념 경축식을 준비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올가을에 등극한 지 40년이 된 것을 경축하는 예식을 거행하려고 한다. 응행의절(應行儀節)을 의정부, 궁내부, 예식원, 장례원(掌禮院)에서 서로 의논하여 결정한 다음 마련해서 들이게 하라." 

4월 24일에 고종은 1902년 10월 18일에 경운궁에서 즉위 40돌 경축식을 하도록 조령을 내렸다. 

7월 20일에 의정부 의정 윤용선이 즉위 40돌 경축 기념식에 대하여 아뢰었다. 
   
“어극(御極) 40년 칭경예식을 참작하고 의논해서 마련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정부에 일제히 모여 자세히 상의해서 의정(議定)한 내용을 별단(別單)으로 올립니다.

별단은 아래와 같다.
  
1. 올해 10월 18일 대황제 폐하의 즉위 40년을 칭경할 때 높고 낮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모두 칭송하는 경축 의식을 할 것입니다. 

1. 외부대신은 6개월 전에 정부와 의논한 다음, 수도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의 공사와 영사들에게 칭경하는 예식 날짜를 알려 본국 정부에 통보하게 할 것입니다. (중략) 

1. 관병식(觀兵式), 원유회(苑遊會), 각종 연회는 예식원에 관계되는 각 부(府), 부(部), 원(院), 청(廳)에서 규례대로 마련하여 설행할 것입니다.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902년 7월 20일)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10월 18일에 치를 ‘어극 40년 칭경예식’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문제도 생겼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예식원을 지어 경축연 행사장으로 삼고, 창덕궁을 중수하여 각국 대사들의 연회장소로 삼으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뭇 도둑들이 마구 들어가 목창(木廠)을 파괴하고 장판지를 벗겨 갔다. (황현 지음 ·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2005, p 119)  
                  
그런데 1902년 가을에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다. 이러자 9월 20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경축식을 1903년에 거행하도록 하고, 임시 혼성 여단(渾成旅團)을 해산하며 수도에 불러올린 각 지방 진위대(鎭衛隊)를 도로 내려보내라고 명하였다.

『매천야록』을 읽어보자.  

“강화, 원주, 대구, 진주, 수원, 전주의 진위대에서 1,500명을 차출하였다. 장차 여단(旅團)을 편성하여 경축연(慶祝宴)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진위대의 병사들이 올라오면서 도로가 소란하였으나, 얼마 후 경축연의 예식 일자가 미루어지자 다시 되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10월 4일에 장례원경 서리 이용선이 40돌 경축식을 ‘내년 4월 30일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윤허하였다.

그런데 40돌 경축식은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되었으나, 기념 우표는 제날짜인 1902년 10월 18일에 예정대로 발행되었다. 대한제국 전환국은 3전짜리 우표 5만 장을 발행했는데 등황색에 왕관과 이화가 디자인되어 있었다. 

아울러 정부는 기념식을 위해 포드 자동차를 구입했다. 탁지부 대신이 주한미국공사 알렌에게 협조를 요청했는데, 알렌은 미국의 자동차 딜러에게 부탁하여 포드 자동차가 인천항에 들어왔다. 그런데 국내에는 운전사가 없어 일본인을 고용했다 한다. 그래서 자동차 업계는 1903년을 한국 자동차의 원년으로 보고 있다. (김용삼 지음,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2020, p 336) 

그런데 1903년 4월 10일에 고종은 칭경식을 가을로 연기하라고 명령했다. 6세의 영친왕 이은(1897-1970)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4월 30일 칭경식을 20일 앞두고 갑자기 연기되었으니 예식 준비 관계자는 우왕좌왕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은이 마마병(천연두)을 앓고 있어 경축식을 다시 가을로 미루었다. 외국 사절을 접견하면 불결한 일이 있을까 싶어 경축연을 가을로 미룬 것이다. 서양의 사절 중에 이미 도착한 사람에게는 우물쭈물 변명해 사례하고 여객선 비용을 배상하여 주었다.”

1885년부터 1897년까지 12년간 주한러시아 공사로 재직했던 웨베르도 1903년에 서울을 방문했다. 경축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 

웨베르는 방문 소감을 남겼다. 

“서울에 5년 만에 다시 와 보니 거리의 남루한 복장이 이전보다 두 배나 많았다. ... 고종 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영친왕의 생모)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 황제는 아주 호감을 주는 인물이지만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다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러시아, 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제대로 몰랐다. ... 관직은 강대국과 종속관계에 놓여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타심이 강하다. 관직은 공적과 능력에 따라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따라 결정됐다. (후략)”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인물과 사상사, 2007, p 19)

한편 경축식과 관련하여 부작용도 일어났다. 역시 『매천야록』에 나온다.   

“일본 상인이 경축 기념잔(盞)을 제조하여 서울에서 판매하였다. 그들은 우리 조정이 날마다 경축행사를 꾸미고 있는 것을 보고 백자 기념잔 10만개를 만들어 그 잔에다가 금으로 새기기를, 「壽齊南山 福溢漢水(수제남산 복일한수 : 수는 남산과 가지런하고, 복은 한강수처럼 넘치리)」라고 하였다. 황제를 송축하는 글귀라고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조롱당함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1903년 가을에 성대하게 치르기로 한 ‘고종 즉위 40년 칭경식’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1903년 10월에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일 간 갈등이 극에 달했고,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여러 번 연기된 칭경식은 치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행사도 치르지 못하고 준비에만 105만 원이 사라졌다. 이는 1902년 국가 예산 739만 원의 13%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1903년 1월 서울 주재 외국 공사관 모임은 “대한제국의 재정 형편으로 볼 때 칭경식은 무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용삼,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 2020, p 336-337 ; 최덕수 지음, 근대조선과 세계, 2021, p 206-207)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