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남도역사기행] 순천왜성과 노량 (25)-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다.
- 기자명 김세곤 기자
- 입력 2022.11.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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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조명연합수군이 화공전을 격렬하게 펼치자 마침내 왜군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어둠 속에서 관음포 내항을 바다로 나가는 외양(外洋)으로 오인하고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이순신은 선두에서 도망가는 왜선을 쫓았다. 해남군수 유형, 당진포 만호 조호열, 진도군수 선의경, 사량만호 김성옥의 함선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왜군은 넓은 바다가 아닌 남해도 관음포 안으로 들어간 것을 알았다. 관음포는 포구 입구에서 안쪽까지 거리가 멀어서 잘못 보면 수평선과 지평선을 혼동하기 쉬운데, 어두운 밤에 치열한 접전 속에서 왜군은 착각한 것이다.
포구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안 왜군은 일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고, 나머지는 조명연합 수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사생결단하였다.
이순신은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왜군을 몰아붙이자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해남 현감 유형(1566~ 1615)은 조총을 6발을 동시에 맞고 쓰러졌다. (1602년에 유형은 제5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화살과 총알이 빗발치는 격전 속에서 직접 북채를 잡고 전투를 독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날아온 적탄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치명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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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 행록’을 읽어보자.
”11월 19일 여명(黎明), 공(이순신)이 한참 싸움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문득 날아드는 총알에 맞았다. 공은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이때 공의 맏아들 아들 회과 조카 완이 활을 잡고 곁에 있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말하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망극, 망극하구나”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성(哭聲)을 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이 틈을 타서 기세를 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시체를 보전하여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저 참으면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는 곧 시체를 안아 방으로 모시니, 오직 공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金伊)와 회, 완 세 사람만 알 뿐이요, 공이 친하게 믿고 지냈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회와 완)두 사람은 다시 기를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왜적이 도독 진린의 배를 에워싸서 거의 함몰당하게 되자, 여러 장수들은 공의 배에서 독전(督戰)하는 것을 보고 서로 다투어 달려들어 포위 속에서 도독의 배를 구하였다.
싸움이 끝났다.”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4권, 비봉출판사, 2006, p 358-359 ; 최원식 지음, 이순신을 찾아서, 돌베개, 2020, p 35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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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안방준(1573-1654)의 ‘노량기사’와 도원수 권율의 장계는 이분의 ‘이충무공 행록’과 상당히 다르다.
먼저 안방준의 ‘노량기사’를 살펴보자.
“적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리고 적이 송희립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곧 조총을 집중적으로 쏘아댔다. 총알이 희립의 갑옷과 투구에 적중하여 이마 뼈를 다쳐, 희립은 배의 바닥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공에게 고하여 아뢰었다.
”송희립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공이 크게 놀라 일어서는 찰나에 겨드랑이 밑에 총알을 맞았다.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외치기를 “통제사가 총알을 맞았다” 하니
이 말을 듣고 송희립이 곧 일어나 앉았는데, 다행히 이마만 깨지고 뇌는 다치지 않았다. 그는 얼굴에 피가 흐르고 옷앞자락이 축축해졌다. 이에 옷을 찢어 이마를 싸매고 곧바로 장군의 자리에 올라가 보니, 공은 이미 숨이 끊어졌고 아들 회가 장차 통곡하려고 하였다. 송희립이 막하 장수 몇 사람으로 하여금 회를 부축하여 입을 막아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송희립은) 공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 붉은 담요로 주검을 싸고 또 다시 초둔(草芚짚, 띠, 부들 따위의 풀로 엮어서 만든 거적)으로 덮었다. 그리고 이내 공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초둔 위에 가리고 앉아서 대신 깃발과 북을 잡고 더욱 급히 싸움을 재촉하니, 왜적의 배는 크게 패하여 대포에 의해 부서지거나 갈구리에 걸려 침몰된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나머지 왜적들이 모두 도망치니 먼 바다에까지 뒤를 쫓다가 돌아왔다. 마침내 공의 죽음을 알리자 각 배에서 모두 통곡하였다.
(안방준 저 ·안동교 역주, 국역 은봉전서, 신조사, 2001, p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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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도원수 권율은 장계에서 이순신 사후에 손문욱이 지휘했다고 보고 했다. 1598년 12월 18일의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도원수 권율이 아뢰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孫文彧)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 손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린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수군의 공(功)이었습니다. 우치적·이섬·우수(禹壽)·유형·이언량의 공이 우수하였고, 수공(首功)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였습니다. 다만 이순신이 군사들에게 약속하기를 ‘다투어 수급을 베려고 하다 보면 적을 많이 죽일 수 없다.’고 경계하였으므로, 이번 전투에서 수급을 참획한 것이 매우 적었습니다."
권율의 장계에 대하여 군공청(軍功廳)은 12월 25일에 선조에게 아뢰었다.
“군공청이 아뢰기를, ’도원수의 장계에 ‘주사(舟師 수군)가 승첩을 올린 군공에 대해서 예사로운 전공과 같은 예로 논상하는 것은 불가한 듯하다.’ 하였기에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도원수의 논리적인 계사를 보고 안팎의 소문을 참작해 보건대, 이번의 전공은 다른 전공과 같지 않다. 그리고 손문욱이 군사를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한 공은 당상직을 초수(超授)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고, 우치적·이섬·우수·유형·이언량 등도 승서(陞敍)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목 이외의 별규(別規)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 및 비변사 당상은 가자 헌의하도록 하라. 이곳에서는 이런 일에 대해 자세히 알기 어려운 형편인데다가 수전을 치른 사람들 중에는 이들 뿐만이 아닐 것이니, 원수에게 다시 문의해서 처리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 듯싶다.‘ 하였다.”( 선조실록 1598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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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순신 전사 당시 상황의 서술은 이분 ·안방준 ·권율등 여러 명이다. 이 중에 가장 많이 신뢰받는 것은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말이 적힌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이다.
내년에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가 상영된다고 한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전사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노량해전은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정오 무렵에 조명수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수군은 200척이 침몰당했고 온전하게 도망친 왜선은 50척 정도 였다. 시마즈의 함선은 반파 상태가 되어 창선도를 거쳐 가까스로 도망쳤고, 다치바나, 소 요시토시, 데라자와 등도 겨우 거제도까지 철수하였으나 암초 또는 얕은 여울에 좌초한 배도 많았다. 시마즈의 부장인 키이레 세주노카미 등은 격전 끝에 군사 500명을 이끌고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반사반생으로 헤엄쳐서 남해도에 기어 올라갔다. 이들은 소 요시토시가 만든 왜성에 잠복하고 있다가 뗏목을 만들어 타고 창선도로 도망쳤다.
한편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는 자신을 구하려 온 왜군이 몰살당하는 중에 묘도 서쪽 수로를 통과하여 남해도 남쪽으로 우회하여 부산으로 탈출했다.
전투가 끝나자 진린이 이순신의 배에 가까이 다가와 왜군에 포위된 그를 도와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려고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 속히 나오시오” 라고 외쳤다.
이순신의 조카 완이 뱃머리에 서서 울면서 “숙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진린은 세 번이나 쓰러지더니 “ 나는 공이 손수 나를 구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단 말이요?”하고 가슴을 치면서 한참이나 통곡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군사들도 슬퍼하니 군사들의 울음 소리가 온 바다를 울렸다.
노량해전에서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가리포 첨사 이영남도 전사하였다. 나중에 이영남은 완도 고금도 충무사에 이순신과 함께 신위가 모셔졌다.
‘호남절의록’에는 이설, 정기수, 나치용(나대용의 종제), 오용운, 오극성, 남병, 나득룡, 김몽성, 이충실, 김덕방, 김예의, 김득효 강극경, 이덕수, 김득룡, 이응춘, 신인수, 김두흥, 이덕경, 김말동, 김백운 등도 노량해전 전사자로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과 진잠의 부장 도명재 등 명나라 수군도 상당수 전사하였다. 전선(戰船)은 조선 수군은 4척, 명군은 2척이 침몰되었다.
우연치 않게 이순신이 순국한 날 류성룡이 파직 당했다. 류성룡은 안동으로 낙향하여 1604년에 ‘징비록’을 썼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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