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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13) - 김천일과 고경명의 근왕(勤王)의병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13) - 김천일과 고경명의 근왕(勤王)의병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 호남 의병은 근왕 의병

 

호남 의병은 향토방위의 영남 의병과는 달리 근왕의병이었다.

한양을 다시 찾고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창의였다.

 

이는 선조가 개성으로 파천하면서 어쩔 줄 모르고 절망하자, 호종한 류성룡이 호남의 충의지사들이 머지않아 봉기할 것이라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선조수정실록 1592511번째 기사).

 

# 나주의 김천일, 먼저 창의하다.

 

5월 초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8천 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올라갔다가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에 지금 임금의 행차가 서도로 가서 그 존망을 알 수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전주로 돌아와 버렸다.

정말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이광의 처사에 격분하여 나주에 사는 전 수원부사 김천일(15371593)은 고경명(15331592)을 만나 전라도 관찰사 이광을 비판하면서 조속히 창의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고경명이 신중론을 취하자 김천일은 독자적으로 거병에 나섰다.

516일에 김천일은 송제민, 양산룡·양산숙 형제, 임환(백호 임제의 동생), 서정후, 이광익·이광주 등과 함께 창의하였고, 63일에 나주 의병 3백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623일에 수원에 이르자 의병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김천일의 활동은 15926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호남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부터 경기도가 완전히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붙좇아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김천일이 의병 수천명을 규합하니, 선조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김천일의 군사가 수원에 이르러 독산성에 웅거하여 적에게 붙좇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도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 고경명, 담양에서 창의하다.

 

523일에 옥과 출신 성균관 학유 유팽로는 이종사촌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을 만나서 창의를 권유했다. 동래부사를 하다가 파직된 고경명은 당시에 광주 시골에 머물고 있었다. (고경명 후임 동래부사가 순절한 송상현이었다.)

 

529일에 광주, 담양, 옥과, 남원, 순창 등 21개 고을 선비들이 담양 추성관에서 모였다. 이날 고경명이 맹주에 추대됐다. 고경명은 각 지역에 창의 격문을 보냈다.

 

, 고경명은 문장이나 아는 졸렬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이지만, 맹주로 추대되니 여러 동지들에게 수치가 될까 두렵다.(중략)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우리 전라도 사람들이여! 아버지는 그 아들을 깨우치고 형은 그 아우를 격려하여 의병대열에 모두 함께 나서자! 속히 결정하여 옳은 길을 따르라. 주저하다가 스스로 그르치지 말라.”

 

이리하여 611일에 고경명은 6천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유팽로가 좌부장, 양대박이 우부장, 안영이 종사관이었다.

614일에 전주에 도착한 고경명은 관군이 임진강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자 양대박은 추가 모병을 위해 향리 남원으로 떠나고, 본진은 전주에서 군사훈련을 한다.

 

# 양대박, 운암전투에서 승리하다.

 

양대박(15431592)은 남원·임실·순창 등에서 1천 명의 의병을 모았다. 남원부사 윤안성도 지원해 주었다. 625일 새벽에 양대박 의병은 임실에서 전주로 향했다. 그런데 척후병으로부터 왜군 수천 명이 임실 운암 계곡에 진을 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왜군은 전주로 향하는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부대였다. 양대박은 운암 계곡에서 아침 식사 준비 중인 왜군을 급습했다. 왜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고 말았다. 고경명 의병 최초의 승리였다. 안타깝게도 양대박은 7월 초에 진중에서 병사(病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