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31)
- 남효온, 김시습에게 시를 보내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남효온은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김시습을 이렇게 적었다.
○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이고 신라의 후예이다. 나보다 나이가 20세 위이다. 자가 열경(悅卿)이고, 호가 동봉(東峰)이며, 또 다른 호가 벽산청은(碧山淸隱)ㆍ청한자(淸寒子)이다. (...)
을해년(1455, 단종3)에 세조가 섭정(攝政)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설잠(雪岑)이라 이름하고, 수락산(水落山) 정사(精舍)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단련하였다. 유생을 보면 말마다 반드시 공맹(孔孟)을 일컬을 뿐 불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또한 말하려 하지 않았다. (...)
신축년(1481) 연간에 고기를 먹고 머리카락을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게 제사 지냈다. 임인년(1482) 이후로는 세상이 쇠퇴하려는 것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않고 여염 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사람들과 장례원(掌隷院)에서 쟁송(爭訟)하였다. (...)
그가 좋아한 사람은 수천부정(秀川副正) 이정은, 안응세(1455~1480)와 홍유손 그리고 나(남효온)였다. (추강집 제7권 / 잡저)
1480년 이후에 남효온은 수락산에 머문 김시습을 자주 찾았고, 도교 책 『황정경』도 빌려주었다. 그가 지은 「동봉(東峰)께 드리다」 시 2수를 읽어보자.
1수
문명을 드날린 삼십 년 동안 文名三十載
서울로 발걸음 들여놓지 않았소 足不履京師
수락 앞에 바위가 드러나고 水落前巖得
봄이 오니 뜰의 나무 제격이라 春來庭樹宜
선사는 부처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禪師不喜佛
제자는 모두 시 짓기를 잘한다오. 弟子摠能詩
스스로 한스러운 일은 이 몸이 묶여 있어 自恨身纏縛
스승을 찾아갈 뜻 이루지 못함이라 尋師意未施
이처럼 남효온은 홍유손, 김일손 등과 수락산에서 기거 중인 김시습을 방문하여 대화하고 시를 지었다. 특히 남효온과 김일손은 1481년 7월에 용문산을 유람하고, 8월에는 원주에서 은거하는 생육신 원호를 함께 방문할 정도로 친했다.
두 번째 시를 읽어보자.
일찍이 산신령과 맺은 약속을 曾與山靈約
어찌 차마 맹세 어기리오? 寒盟可忍爲
한가로운 꽃들이 골짜기에 피는 날 閒花開壑日
이 몸이 그대를 찾아가겠소 老子訪君期
달은 허물벗는 나방처럼 떠오르고 月上新蛾彀
쌓인 눈이 봄볕에 녹는구려 時春積雪澌
도경(道經)은 이제 모두 베끼셨는지요? 道經知寫否
대낮에 영지는 잘 자라겠구려 白日長靈芝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은 어찌 돌려주지 않습니까. 한 두달 안에 돌려주기로 해놓고는 해가 바뀌었는데도 안 돌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추강집 제2권 / 시(詩) ○오언율시 五言律詩)
시 말미에 남효온은 김시습에게 빌려준 『황정내경경』 책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황정경(黃庭經)』은 중국 동진(317~420)시대의 양생(養生)과 수련(修練)의 원리를 담고 있는 『도덕경(道德經)』,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와 함께 선도(仙道) 수련의 도교 경전이다. 「내경경(內景經)」 1권과 「외경경(外景經)」 3권으로 되어 있다.
황정(黃庭)은 인간의 성(性)과 명(命)의 근본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뇌(上黃庭), 심장(中黃庭), 비장(下黃庭)을 말한다.
황정경은 명리(名利)를 탐내지 말고 염담(恬淡 ; 욕심없이 깨끗하고 담담함), 무욕, 허무자연의 마음 상태를 지니라고 가르친다. 또 그러한 상태에 이르러면 기욕을 끊고 호흡을 조절하며 타액을 삼키고 신성(神性)을 길러 정(精)·기(氣)·신(神)을 황정에 응집시키라고 말한다.
당시에 김시습은 도교 사상에 빠져 있었다.
순례자의 노래 (32)
- 김시습, 남효온에게 답시를 보내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남효온의 「동봉(東峰)께 드리다」 시 2수를 받은 김시습은 「추강의 시에 화운하여」 시 4수를 지어 남효온에게 보냈다. 이 시들을 읽어보자.
1수
우습구나 하릴없는 자들이 堪笑消(磨)子
나를 승려의 스승이라 부르네 呼余髡者師
소년 때는 유학이 심히 좋더니 少年儒甚好
만년에는 묵씨(불승)이 마땅하네 晩節墨偏宜
세간의 하릴없는 사람들이 김시습을 승려의 스승이라고 비웃지만, 내 속내를 누가 알 것인가. 나는 소년 시절엔 유학을 좋아했고 지금은 불교 승려라네.
가을 달 밝으면 석 잔 술 마시고 秋月三桮酒
봄바람 불면 시 한 수 짓는다오 春風一首詩
좋은 사람 불러도 오지 않으니 可人招不得
누구랑 거닐며 즐거워하랴 誰與步施施
자연과 벗 삼아 술 마시고 시 짓고 사는 김시습. 하지만 좋은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 외롭다.
2수
봄 뜻이 부들 못에 가득한 데 春意滿蒲池
올챙이 꼬물꼬물 즐겁게 노니네 蝡蝡活卽師
띳집 처마 짧아서 더욱 기쁘고 茅簷短更喜
바람 햇볕 따뜻하여 아주 좋구나 風日暖相宜
시냇가에 매화 찾아가니 흥겹고 溪畔探梅興
술잔 들어 달에게 묻는 시를 짓노라 樽前問月詩
그대와 나란히 누워 이야기 하면서 逢君聯席話
나는 서시(西施)를 흉내낸 동시(東施)를 본받으려오 吾欲效東施
못난 김시습(東施)이 아름다운 남효온(西施)을 흉내 내겠다는 말이다.
서시(西施)는 BC 5세기 춘추시대 말기 월(越)나라 미인으로, 한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嬋),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역사상 4대 미인(四大美人)으로 꼽힌다.
서시는 월나라 저라산(苧萝山) 출신으로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이다. 당시 서시가 살았던 마을은 시(施)씨 집성촌으로 동서로 나뉘었는데 그녀가 서촌(西村)에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시(西施)라 불렀고, 동쪽에 사는 여인들을 동시(東施)라 했다.
서시의 아버지는 나무꾼이었고 어머니는 빨래꾼이었는데 빨래하는 직업을 완사(浣紗)라 했다. 이 때문에 서시의 고향 마을의 시내를 완사계(浣紗溪)라 부른다. 서시가 시냇가에서 빨래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물고기가 강물에 비친 서시의 미모에 반해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런 서시의 아름다움에 빗대 ‘침어(侵魚)’라는 단어가 생겼다.
한편 서시는 월왕 구천의 책사 범려에게 발탁되어 미녀 첩보원 교육을 3년간 받고 오왕 부차에게 바쳐졌다. 이에 오자서(伍子胥)가 부차에게 진언하기를 ‘신이 듣기에 하(夏)는 말희(妺喜)로 인해 망하였고, 은(殷)도 달기(妲己)로 인해 망하였으며 주(周)가 망한 것도 포사(褒姒)로 인한 것이니 무릇 미인이라는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요인이니 청컨대 받으시면 아니 될 것입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부차는 서시를 위해 영암산(靈巖山)에 관왜궁(館娃宮)을 짓고, 인공연못 완화지(翫花池)와 완월지(翫月池)를 조성하였다. 이후 부차는 서시의 미모와 교태에 빠져 정사를 멀리했다.
또한 서시의 활약으로 월나라는 충신 오자서를 제거하였고 오나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BC 475년 월나라의 총공격을 받은 오나라는 연이어 패배했고, BC 473년에 부차가 자결하여 멸망했다.
(그래서 서시를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절세미인인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부른다.)
한편 서시(西施)는 가슴앓이 병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다녔다. 그런데 동쪽 마을에 사는 추녀(東施)가 서시처럼 눈살을 찌푸리면 아름답게 보이는 줄 알고 잔뜩 찌푸린 채 다녔다. 그러자 마을의 부자는 대문을 굳게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은 처자를 이끌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에 나온다.
이리하여 ‘서시빈목(西施嚬目)’·‘동시빈축(東施嚬蹙)’이란 사자성어가 나왔고, ‘빈축(嚬蹙)을 사다’는 단어도 생겼다.
그런데 이 고사는 공자가 옛날 주나라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하려 하는 것은 마치 추녀가 서시를 무작정 흉내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장자가 빈정거린 것이라 한다.
'김일손의 후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례자의 노래 (33)-(34) 김시습과 서거정의 인연 (0) | 2022.04.05 |
---|---|
길 위의 역사 3부 – 생육신 순례 (7) (0) | 2022.04.05 |
순례자의 노래 (32)- 김시습, 남효온에게 답시를 보내다. (0) | 2022.03.26 |
순례자 노래 25-30회 김시습과 남효온 만남 (0) | 2022.03.24 |
순례자의 노래 (25)- 남효온의 「주잠(酒箴 술을 경계함)」 시 (0) | 2022.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