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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순례자 노래 25-30회 김시습과 남효온 만남

순례자의 노래 (25)

- 남효온의 주잠(酒箴 술을 경계함)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남효온은 어떤 때는 김시습과 친하게 지낸 홍유손, 그리고 성균관에서 만난 김일손과 함께 수락산을 찾았다. 네 사람은 늘 술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談笑)했다.

 

한번은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나는 선왕(先王)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벼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선생은 이와 다르니 세도(世道)를 위하여 한번 나아감이 옳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효온은 소릉이 복위된 뒤에 응시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시습은 또다시 말하지 않았다.

 

한편 남효온은 엄청 술을 좋아했다. 애주가의 수준을 넘어 주당(酒黨)이었다. 남효온의 술 사랑은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기록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먼저 후손 남공철이 쓴 남효온의 묘갈명(墓碣銘) 첫 대목이다.

 

공은 경태(景泰) 갑술년(1454, 단종2)에 태어났다. 사람됨이 청명(淸明)하고 호매(豪邁)하여 무리 중에 초연히 고사(高士)의 풍모가 있었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때때로 심하게 마시고 크게 취하며 위언(危言)과 궤론(詭論)을 즐겨 하여 기휘(忌諱)를 저촉하였다. 하루는 어머니 공인(恭人)이 걱정하여 경계하는 말을 하자, 공이 이로부터 결코 다시 마시지 않았고 지주부(止酒賦)’를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남효온과 친했던 신영희도 사우언행록에서 남효온의 음주 사실을 적었다.

남효온의 자는 백공이요, 호는 추강 또는 행우라고 한다. 재주와 행실이 뛰어났으나 의복은 늘 거칠었고, 조랑말을 타고 다녀 아녀자들이 쫓아가며 손가락질하곤 했다. 술을 즐겼는데 모친의 꾸지람을 듣고 지주부라는 글을 짓고 10년간 마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풍병이 들자 다시 마셨다. 그러다가 병세가 조금 가라앉으니 다시 지주부를 짓고 5년 동안 마시지 않았다. 뒤에 병이 위독해지자 다시 술과 함께 지내며 벼슬도 마다 않고 지내다가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신영희가 지켜본 남효온은 폭음과 절주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남효온은 술을 끊겠다고 다짐했다. (정출헌 지음, 남효온 평전, 한겨레출판, 2020, p 154-155)

 

1481(성종 12) 25일에 남효온은 남산 기슭에서 과음으로 실수하고 주잠(酒箴 술을 경계함)시를 지었다. 추강집1권에 나온다. 1481년이면 남효온이 수락산에서 기거하는 김시습을 자주 만났던 때였다.

 

술자리 처음에는 예의가 엄숙하여 初筵禮秩秩

손님과 주인이 거친 행동 경계하니 賓主戒荒嬉

오르고 내림에 진실로 예법이 있고 升降固有數

나아가고 물러날 때도 절도가 있네 進退抑有儀

 

석 잔 술이면 말이 비로소 많아져서 三桮言始暢

법도를 잃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失度自不知

열 잔 술이면 소리 점점 높아져서 十桮聲漸高

주고받는 얘기가 더욱더 어지럽네 論議愈參差

 

뒤이어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니 繼以恒歌舞

온몸이 피로한 줄 깨닫지 못하네 不覺勞筋肌

술자리 마칠 때면 동서로 치달려서 筵罷馳東西

저고리 바지가 온통 진흙투성이라 衣裳盡黃泥

올라탄 말 머리가 향하는 곳마다 馬首之所向

아이들이 손뼉 치면서 비웃어대고 兒童拍手嗤

끝내 비틀대다 넘어지고 자빠져서 終然顚與躓

부모가 주신 몸을 손상시키고 마네 而傷父母遺

 

술의 재앙을 모르는 바 아니건만 非不知酒禍

스스로 좋아하기를 단 엿처럼 하네 顧自甘如飴

무풍(巫風)서경(書經)에서 경계하였고 巫風戒於書

빈지초연(賓之初筵 손님 잔치)시경에 실려있네 賓筵播於詩

 

무풍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삼풍십건(三風十愆)의 하나이다.

서경감히 궁중에서 항상 춤추고 집에서 술 취하여 노래함이 있으면 이것을 무풍이라 한다.敢有恒舞于宮 酣歌于室 時謂巫風하였다.

빈지초연은 시경(詩經)에 실려 있다. 잔치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탈선하는 행동이 흔함을 경계하는 시로서, 주희는 집전에서 위()나라 무공(武公)이 술을 마시고 잘못을 뉘우치며 지은 시라고 하였다.

 

양웅은 일찍이 주잠(酒箴)을 지었고 揚雄曾著箴

백유(伯有)는 술 때문에 죽었거늘 伯有死於斯

 

백유는 춘추시대 정()나라 사람 양소(良霄)의 자이다. 양소는 술을 좋아하여 집에 지하실을 만들어 놓고 종을 치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결국 자석(子晳)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어찌하여 이러한 광약을 마시는가 胡爲此狂藥

덕을 잃음이 항상 여기에 있다네 失德常在玆

술에 대한 경계가 서경에 실려 있으니 酒誥在方策

의당 생각하여 규율로 삼아야 하리 宜念以爲規

 

순례자의 노래 (26)

- 김시습, 남효온과 편지를 주고받다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2월에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은 남효온은 김시습과 술에 관한 서신을 몇 차례 주고 받았다. 김시습의 매월당집에는 편지 3통이, 남효온의 추강집에도 편지 한 통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면 추강집4에 수록된 편지를 읽어보자. 먼저 동봉산인(東峰山人)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저께 선생(남효온을 말함)을 모시고 천석(泉石) 위에서 노닐며 종일토록 서성이다가 청계(淸溪)에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맑은 흥취가 다하지 않았건만 작별이 갑작스러웠으니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릅니다.

 

봉별(奉別)한 이후로 지금 며칠이 되었지만 함께 얘기할 만한 사람이나 계산(溪山)에서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임이 없으니, 이른바 사흘 동안 도덕을 얘기하지 않으면 혀가 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 줄기 푸른 산과 한 조각 흰 구름이 청하지 않는 벗이 되고 말없는 짝이 되어 여전히 서로 대하고 있으니, 이것들이 10년 동안 마음을 알아주는 제 벗들입니다. 도성 안에 이러한 벗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만났을 때 선생이 술을 끊어 주성(酒星)을 하늘의 감옥에 가두고 취일(醉日)을 진()나라의 구덩이에서 불사르고자 하였으니, 그 뜻이 아름답기는 아름답습니다.

 

()나라와 은()나라의 임금이 술 때문에 망했고, ()나라와 송나라 선비들이 술 때문에 어지러워졌으니, 이는 만세토록 살피고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선 옛사람이 술을 베풀었던 까닭은 본래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손님을 대접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병을 다스리고 복을 빌고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복(百福)의 모임이 술이 아니면 행해지지 못했던 것이니,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술에 빠져서 덕을 잃으며 거동을 어지럽혀서 몸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혹 어지러움에 이를까 염려하여 주례(酒禮)를 만들어 한 번 술을 올리는 예()에 손님과 주인이 백번 절하여 종일 마셔도 취하지 말라 했습니다. 제사에는 남은 음식이 있고, 집을 짓고는 낙성식이 있고, 손님에게는 대접이 있고, 길 떠나는 사람에게는 송별연이 있고, 고을에는 향음(鄕飮)의 예가 있고, 가정에는 어버이에게 축수(祝壽)를 올리는 예가 있고, 제사가 있으면 그 술을 맛봄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정(人情)을 다하고 인사(人事)를 극진히 하려는 것이요, 후세 사람들에게 웃통을 벗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마시며 개구멍으로 출입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을 살피지 않고 술이 재앙을 낳는다고 여겨서 완전히 끊고자 하니, 이는 마치 밥을 짓다가 불똥이 튈까 염려하여 일생동안 익힌 밥을 차리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끊는 것도 예법에 크게 어두운 것이요, 중용에서 너무 벗어난 것이니 군자가 행할 도리가 아닙니다.

 

만일 술이 끊어야 하는 것이라면, 논어에서 공자는 술에 한량없이 마실 수 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거나 술 때문에 곤란을 겪은 일이 없으니 내가 무엇이 거리낌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무공(衛武公) 또한 일찍이 허물을 뉘우치며 말하기를 석잔 술에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더 마시게 해야 되겠는가했으니, 위무공 또한 술을 완전히 끊은 것이겠습니까? 다만 경계했을 뿐입니다.

 

지금 선생이 만약 예의를 버리고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종족을 멀리하여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사신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예악과 문물이 있는 이 세상에 살면서 효도하고 공손하라는 선왕의 격언을 읽었을 것인데, 성급하게 한 잔 술도 안 마시겠다는 것이요?

 

앞으로 제사와 잔치 자리에서 술을 올리기만 하고 마시지 않으려오? 절제한다거나 삼간다고 할 수는 있지만, 죽을 때까지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저로서는 취하지 못할 바입니다. 선생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더구나 일전에 보건대 선생의 용모가 옛날보다 수척해졌습니다. 몸이 쇠약하게 되면 어머님께서 반드시 걱정하실 것이니, 뜻을 거슬러서 공경의 도리에 어긋났고 술을 끊어 근심을 끼침으로써 다시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공경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선생 또한 일찍부터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선생께선 널리 헤아리소서.

 

순례자의 노래 (27)

- 남효온, 김시습에게 편지를 쓰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6월경에 남효온은 절주(節酒)하라는 김시습의 편지에 대한 답신을 썼다.

 

동봉산인(東峰山人 김시습의 호)에게 답하는 편지

 

지난번에 선생께서 더할 수 없는 호의를 베푸시어 산중에서 저를 전송하며 멀리 호계(虎溪)를 건너오셨으니 은혜와 영광이 몹시 깊었습니다.

 

호계(虎溪)는 중국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시내이다. ()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이곳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그가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넘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고 한다.

 

또 저를 천박하고 용렬하여 분발하거나 추론하는 지혜와 식견이 없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몸가짐과 시행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며 고의(古義)를 인용하여 간곡하게 반복하셨으니, 다행스러움이 또한 큽니다. 분골쇄신(粉骨碎身)하지 않고서는 보답할 길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분발하거나 추론하는 지혜와 식견은 論語술이(述而)’편에 나온다.

이는 공자의 교육 방법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울 때)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발휘하도록 말해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그것으로 나머지 세 귀퉁이로써 반증(反證)하지 못하면 다시 일러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則不復也

 

그러나 제가 일찍이 듣건대, 쇠붙이 천 균()은 지극히 무겁지만 맹분(孟賁 : 전국 시대의 용사 勇士)이 들기에는 쉽고, 깃털 하나는 지극히 가볍지만 초파리가 짊어지기에는 무겁다고 했으니, 이는 어째서이겠습니까?

 

힘의 강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실행하는 것 또한 이와 같아서 저절로 도에 들어맞는 사람도 있고 억지로 힘써서 도를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대저 술의 덕이 어떠한지는 오경(五經)과 자사(子史)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술이 그 중도(中道)를 얻으면 빈주(賓主)를 합할 수 있고 늙은이를 봉양할 수 있으며, 가까이 궤석(几席 안석(案席)과 돗자리)사이에 시행해도 문채가 있고 멀리 천지에 통해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수심에 찬 뱃속은 술을 얻어 풀리고, 답답한 가슴은 술을 얻어 편안해져서 천지와 더불어 조화를 함께하고 만물과 더불어 조화를 통하기 때문에 옛 성현이 스승과 벗이 되고 천백 년이 한가한 세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를 잃으면 감옥살이하는 사람처럼 머리를 풀고서 항상 노래하고 어지럽게 춤추며, 백번 절하는 사이에 시끄럽게 부르짖고 서로 읍양(揖讓 읍하는 예를 갖추면서 사양함)하는 즈음에 넘어지고 자빠져서 예의를 무너뜨리고 의리를 없애며 절도 없이 소동을 일으킵니다.

 

심한 경우에는 까닭 없이 마음을 풀어놓고 눈을 부라리다가 혹 싸움이 일어나서 작게는 몸을 죽이고, 더 나아가서는 집안을 망하게 하고, 크게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술의 재앙이 이와 같지만 주공(周公)과 공자가 쓰면 어지럽지 않았고,

 

논어향당(鄕黨)’ 편을 보면 공자는 술에 한정이 없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고 하였다.

 

술의 덕이 이와 같지만 진준(陳遵)과 주의(周顗)가 쓰면 몸을 죽였으니, 그 얻고 잃는 사이에는 한 터럭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준(陳遵)은 한나라 애제(哀帝)ㆍ왕망(王莽)ㆍ회양왕(淮陽王) 때의 사람으로, 성품이 방종불구(放縱不拘)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회양왕이 패했을 때에 술에 취해 있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주의(周顗)는 진()나라 원제(元帝) 때 인물로,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 실수로 자주 견책을 받았다. 뒤에 왕돈(王敦)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런 까닭으로 중인(中人) 이하의 사람은 견고하게 다잡지 않고 절도 있게 쓰지 않으면 맛있는 술맛이 사람을 변하게 하여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갈수록 어지러워지다가 점점 술주정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술주정하는 줄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이치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선비로서 뜻이 견고하지 못한 사람은 응당 몸소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하고 안으로 꾸짖어서 어지러움의 뿌리를 막고, 술 끊기를 보통 사람보다 백 배 더한 뒤라야 술의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례자의 노래 (28)

- 남효온, 김시습에게 편지를 쓰다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6월경에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를 계속 읽어보자.

 

이런 까닭으로 서경에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가 실려 있고,

시경빈지초연(賓之初筵)이 있으며, 양자운(揚子雲)이 이로써 주잠(酒箴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고 범노공(范魯公)이 이로써 시를 지었으니, 제가 어찌 술잔을 조용히 잡고서 향음주(鄕飮酒 고을 사람들이 때때로 모여 술을 마심)와 향사(鄕射 활쏘기)의 사이에서 진퇴하고 읍양(揖讓 읍하는 동작과 사양하는 동작)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서경(書經)은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정치를 기록한 책이다. 즉 요순 임금과 하··3대의 정치적 사료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서경4주서(周書)’엔 주공(周公)이 술을 경계하는 글인 <주고(酒誥)>가 수록되어 있다. 주공은 성은 희(), 이름은 단()으로,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이다. (: BC 1111~255)나라 초기에 국가의 기반을 다졌고, 공자는 · · · · ··주공일곱 분을 중국 황제들과 대신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극찬하였는데, 오직 주공만 임금이 아닌 섭정이었다.

 

무왕(武王)이 병사하자 13세의 무왕 아들이 성왕(成王)으로 즉위했는데, 주공은 직접 왕권을 장악하라는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고 섭정을 맡아 국사를 돌보았다. 그는 7년 동안 섭정한 후 성왕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주고(酒誥)>는 주공이 명을 받들어 강숙(康叔)을 위나라에 봉할 때 훈계한 말이다. 은나라 백성들은 은나라의 폭군 주() 임금의 영향으로 술을 너무 좋아했기에, 주공은 술의 해()를 훈계한 것이다.

 

그러면 <주고(酒誥)>를 읽어보자.

 

왕명으로 주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나라(주 임금의 도읍지 지금의 하남성 기현 근처)에 큰 명령을 공포하겠소. 그대들이 공경하는 아버님 문왕께서는 서쪽 땅에 나라를 여시고, 여러 제후들과 여러 관리들과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삼가게 하려고 아침저녁으로 말씀하셨소. ‘제사에만 술을 써야 한다. 하늘은 명을 내리시어 우리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는대 오직 큰 제사에만 쓰도록 하셨다. 하늘이 벌을 내리시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덕을 잃었기 때문인데, 또 그것은 모두가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 작고 큰 나라들이 망하게 되는 것도 역시 모두가 술로써 죄를 짓기 때문이다.’

 

문왕께서는 젊은이와 관리들에게도 교훈을 내리셨소. ‘언제나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여러 나라들 모두 제사 때에만 술을 마셔야 할 것이니, 그러면 덕이 도와 취하지 않을 것이다.(德將無醉)’”

 

(...) 임금은 또 말하였다.

봉아! 우리 서쪽 땅에서는 저 제후들과 일을 맡아보는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문왕의 가르침을 잘 지키어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에 이르도록 은나라의 천명을 대신 받게 된 것이다.”

 

왕명은 계속되었다.

내가 듣건대 옛날에 은나라의 어진 임금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할 일에 힘쓰고 어짊을 지켰다 한다. 이랬으니 그들이 술 마시는 일을 좋아했겠느냐?

 

그런데 그 뒤를 이은 임금은 몸에 흠뻑 술이 배어, 크게 법도에 어긋나도록 방종하고 술에 너무 빠져서 즐기기만 하였다. 그의 마음은 악독하고 잔인해져서 죄가 상나라 도음에 쌓여 은나라가 망하게 되었어도 근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늘은 은나라에 벌을 내리시고 은나라를 더 이상 아끼지 않았으니, 이는 오직 술 마시며 향락에만 빠졌기 때문이다. (...) 누가 여럿이 술을 마시고 있음을 알리거든, 너는 놓치지 말고 모두 붙잡아 주나라로 보내거라. 나는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 또 은나라의 여러신하와 관리들이 술에 빠져 있다면 그들을 죽일 것 없이 가르쳐라.”

 

왕명으로 또 말하였다. “봉아! 너는 언제나 나의 훈계를 따라라. 너의 관리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술에 빠지지 않도록 하거라.”

(김학규 역저, 신완역 서경, 명문당, 2002, p 341-351)

 

주공은 강숙에게 강숙 뿐만 아니라 신하와 백성들도 술을 삼가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그러면서 주나라 관리들이 술을 마시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면서 은나라의 관리들이 술에 빠져 있다면 은덕을 베풀라고 훈계한다. 은나라 백성들에 대한 회유책을 편 것이다.

 

순례자의 노래 (29)

- 남효온, 김시습에게 편지를 쓰다 (3)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6월경에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는 계속 된다.

 

이런 까닭으로 서경에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가 실려 있고,

시경빈지초연(賓之初筵)이 있으며, 양자운(揚子雲)이 이로써 주잠(酒箴을 지었고 범노공(范魯公)이 이로써 시를 지었으니, 제가 어찌 술잔을 조용히 잡고서 향음주(鄕飮酒와 향사(鄕射)의 사이에서 진퇴하고 읍양(揖讓 읍하며 사양함)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빈지초연(賓之初筵 손님 잔치)시경(詩經)에 실려 있다. 잔치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탈선하는 행동이 흔함을 경계하는 시로서, 주희는 집전에서 위()나라 무공(武公)이 술을 마시고 잘못을 뉘우치며 지은 시라고 하였다.

 

범노공(范魯公)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범질(范質)이다. 그는 조카 범고(范杲)가 자신을 천거해 주기를 바라자, “너에게 술을 즐기지 말기를 경계하나니, 미치게 만드는 약이요 아름다운 맛이 아니다.戒爾勿嗜酒 狂藥非佳味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주었다. 술이 광약(狂藥)이라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약하고 덕이 엷기에 그 맛을 달게 여겨 조절하지 못하면 마음이 산란해져서 스스로 술을 이기지 못함이 초파리가 깃털 하나를 짊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이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술을 너무 좋아하여 중년에 비난을 받은 일이 적지 않았지만, 방자한 주광(酒狂)이 되어 영원히 버려짐을 자신의 분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몸은 외물(外物)에 끌려가고 마음은 육체에 부려져서 정신은 예전보다 절로 줄어들고 도덕은 처음 마음에서 날로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점점 부덕한 사람이 되어 집안에서 방자하게 주정을 부리다가 어머님께 크게 수치를 끼쳤습니다.

 

맹자는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불효라고 여겼거늘 하물며 술주정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술이 깨고서 생각건대 그 죄가 3천 가지 중의 으뜸에 해당되니, 무슨 마음으로 다시 술잔을 들겠습니까?

 

맹자는 장기 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을 다섯 가지 불효 중 두 번째 불효로 여겼다. 이는 맹자(孟子)<이루 하(離婁 下)>에 나온다.

 

맹자가 제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제자인 공도자가 맹자께 여쭈었다.

 

광장(匡章)은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불효자라 부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 불효한 광장과 가깝게 지내시니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광장은 제나라의 장군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여 마굿간 아래에 파묻었다. 광장은 여러 차례 아버지에게 죽은 어머니를 용서하고 이장(移葬)할 것을 권했으나 아버지는 끝내 들어주지 않자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자 맹자가 답하여 다섯 가지 불효를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불효라고 부르는 것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자기 몸의 편안함 만을 추구하여 부모 봉양을 거들떠 보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불효이다. 장기두고 바둑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효이다. 재물을 좋아하고 처자식만 편애하여 부모는 돌보지 않는 것이 세 번째 불효이다.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하여 부모에게 불명예를 안겨드리는 것이 네 번째 불효이다. 부질없는 혈기의 용맹을 좋아하며 맨 쌈박질만 해대면서 부모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다섯 번째 불효이다,

 

, 한번 생각해보라. 광장(匡章)이 이 중 한 가지 불효라도 범했단 말인가? 광장은 그런 인물이 아니다. (후략)”

 

한편 남효온은 술주정이 불효라고 말한다. 공자는 효경(孝經)에서 말하기를 오형의 종류가 3천 가지이지만 죄는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다.五刑之屬三千 而罪莫大於不孝하였다.

 

순례자의 노래 (30)

- 남효온, 김시습에게 편지를 쓰다 (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6월경에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를 계속 읽어보자.

 

이에 천지에 물어보고 육신(六神)을 참례하고 제 마음에 맹세한 뒤에 모친에게 아뢰기를 지금 이후로는 군부(君父)의 명이 아니면 감히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까닭은 모친이 술 취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제사 지내고 제육을 받아 음복한다거나 축수를 올리고 술잔을 되돌려 받았을 때에 달고 맛있는 술이 뱃속을 적셔도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제가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저의 뜻이 대략 이와 같으니, 선생께서 비록 술을 권하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약속한 말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저의 말은 어길 수 있다 하더라도 제 마음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귀신을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귀신은 기만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천지를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소홀히 대할 수 있다면 어느 곳에다 이 몸을 두겠습니까.

 

더구나 어머니께서 아들을 기르며 매양 술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다가 이 말을 들으시고 기쁜 빛이 얼굴에 감돌았으니, 술을 끊겠다는 맹세를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오호라! 술이 깬 굴원(屈原)이나 술이 취한 백륜(伯倫)은 본래 둘이 아니고, 청백한 백이(伯夷)와 조화로운 유하혜(柳下惠)는 결국 하나의 도입니다.

굴원(屈原(BC 343~BC 278)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충신이다. 그는 초나라 회왕을 도와 정치를 했으나,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로 추방당했다. 쫓겨난 그는 상수 연못가를 거닐었는데 한 어부를 만났다.

어부가 굴원에게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가 흐려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하였고,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술에 깨어 있다가衆人皆醉 我獨醒이렇게 추방당한 거라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어부가 물결 흐르는 대로 살지, 어찌 고고하게 살다가 추방을 당하셨소?”라고 굴원에게 다시 묻자, 굴원은 차라리 상수 물가로 달려가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葬事)를 지낼지언정 어찌 순백(純白)으로 세속의 티끌을 뒤집어 쓴단 말이오?”라고 답했다.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노로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결국 굴원은 울분을 참지 못해 55일에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다. 이후 굴원이 죽은 55일은 단오절이 되었다.

초사(楚辭)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여기서 탁영(濯纓)’갓끈을 씻는다.’는 뜻인데 사관(史官) 김일손(1464~1498)의 호가 탁영이었다. 김일손은 세상이 흐림에도 불구하고 갓끈을 씻겠노라고 호를 탁영이라 지었다. 하지만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혹독했다. 폭군 연산군은 김일손을 능지처사했다.

 

1498(연산군 4)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최초의 사화이다. 사화는 사림의 화란이란 의미인데, 무오사화는 사초(史草)로 인하여 화를 입었기 때문에 史禍(사화)라고도 불린다.

 

 

아울러 백륜(伯倫)은 진()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유령(劉伶)의 자(), 그는 술을 몹시 좋아하여 주덕송(酒德頌)을 지었다.

 

한편 맹자는 유하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맹자만장 하(萬章 下)’에 나온다.

 

백이는 성인으로서 맑은 분이고, 이윤은 성인으로서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요, 유하혜는 성인으로서 온화한 분이고, 공자는 성인으로서 시기에 알맞게 하는 사람이다

 

남효온의 편지는 이어진다.

 

선생께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목생(穆生)을 억지로 허물하지 마시고 한 글자로써 가부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생(穆生)은 전한(前漢) 초원왕(楚元王) 때의 사람이다. 초원왕이 주연(酒宴)을 베풀면서 술을 좋아하지 않는 목생을 위하여 항상 단술을 마련했다고 한다.

 

중하(仲夏)의 극심한 더위에 삼가 선생의 일상에 만복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연단(鉛丹 묘약)을 제조하는 데 사용하는 신령스러운 복령(茯苓) 한 봉지를 올리오니, 선계(仙界)의 일월을 혼자만 대하지 마시고 베갯속의 홍보(鴻寶 :한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이 베갯속에 비장(秘藏)하였던 도술 서적로 야윈 이 몸을 구제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