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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전쟁과 조약의 한국 근대사 (42)강원도 유생, 홍재학이 상소하다.

전쟁과 조약의 한국 근대사 (42)

- 강원도 유생, 홍재학이 상소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고종의 척사윤음과 위정척사파에 대한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유생 수백 명은 집단으로 대궐 앞에서 한 달이 넘도록 복합상소를 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 양상은 과격해지고 논조도 강경해졌다.

 

1881년 윤 76일에 승정원에서 복합상소에 대하여 아뢰었다.

 

방금 대궐문 앞에 엎드린 유생들이 올린 상소를 봉입하라는 명을 받고 사도(四道)의 소본(疏本)을 가져다 보니 그 중 강원도 유생 홍재학 등이 올린 상소의 내용은 종이에 장황하게 써 놓은 구절들이 더없이 흉측하고 패악스럽습니다. 속히 처분을 내리소서.” (고종실록 1881년 윤 763번째 기사)

 

그러면 홍재학 등이 올린 상소를 읽어보자

 

"신들이 삼가 듣건대,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오륜 오상(五倫五常)의 법과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몹시 위태롭다는 것을 전하가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온 나라에서 입는 것은 서양 직물이고 서양 물감을 들인 옷이며 온 나라에서 쓰는 것은 서양 물건입니다. 접견하는 사람도 서양 사람이고, 탐내어 침 흘리는 것도 서양의 기이하고 교묘한 것들입니다.

 

대체로 서양의 학문이 원래 천리(天理)를 문란하게 하고 인륜(人倫)을 멸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심합니다.

 

 

(...)이른바 명사(名士)와 석유(碩儒)들은 새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여 거기에 빠져들어 번갈아 찬미하자 이름 있고 지위 있는 사람도 하루가 못 되어 휩쓸립니다. 그들이 말하는 견문을 넓히고 흉금을 틔운다.’는 말은 이미 공자(孔子)가 말한 육예(六藝)가 아닙니다.

 

(...) 이른바 황준헌의 책자를 가지고 돌아와서 전하에게도 올리고 조정 반열에도 드러내 놓으면서 하는 말에, ‘여러 조목에 대한 그의 논변은 우리의 심산(心算)에도 부합됩니다. 서양 사람이 중국에 거주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다 사학을 믿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까?

 

전하의 사신과 재상은 전하의 사신, 재상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심복으로서 구라파와 내통한 것이니, 어찌 삼천리 우리 옛 강토가 오늘에 와서 개돼지가 사는 곳이 되고 500년 공자와 주자의 예의가 오늘에 와서 거름에 빠질 줄을 생각했겠습니까?

 

(...)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기강을 떨치고 사직을 위하여 죽는 의리를 결단하여 싸워 지킬 계책을 결정하소서. 나라 안에 있는 서양 물건들을 거두어서 네거리에다 놓고 불태워 버리소서. 기무아문(機務衙門)을 혁파하고 5()의 제도를 되살리며, 군사들의 급료를 후하게 주며, 무당과 중들의 기도를 금지시키고 배우의 놀음놀이를 멀리하며, 노닐며 즐기던 구습을 혁파하고 나라를 근심하고 근면하는 덕을 다하소서.

 

(...) 삼가 사도(四道)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 대하여 내리신 전교를 보았는데, 전하는 무슨 까닭에 공론(公論)을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입니까? 전하는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을 가하고 유배를 보냈으니, 이것이 간언(諫言)을 따르는 성주(聖主)의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 또 삼가 요즘 내린 윤음(綸音)을 보니, 실로 전하의 뜻이 척화(斥和)에 근엄하게 하면서도 도리어 상도(常道)에서 벗어난 것에 연연하고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동래·덕원·도하(都下)에 있는 서양 사람들이 여전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며 화의를 주장하는 무리들이 여전합니다.

 

(...) 전하의 위력이라면 신들을 비롯한 소두(疏頭) 몇 명을 형벌을 가할 수도 있고 찬배(竄配)할 수도 있으며 저잣거리에서 찢어 죽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집집마다 원망하고 사람마다 분노하는 것은 전하의 힘으로써도 제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처럼 전에 없던 지나친 조치를 취하고도 막연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학문을 일삼지 않으므로 아는 것이 이치에 밝지 못하고 안일에 빠진 것을 달게 여기고 참소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배우지 않는 것은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재상 이하 이익만 즐기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전하의 학문과 덕행이 성취되면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게 될 것이므로 자기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을 깊이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경연을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고 어진 이를 내치며, 도학을 썩은 선비의 무용지물이라 하고, 속류(俗流)들을 재주 있고 부릴 만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억누르거나 추켜세우고 주거나 빼앗는 것을 한결같이 제멋대로 하였습니다. 마침내 전하의 총명을 이토록 극도로 흐리게 하였으니 그 죄악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종실록 1881년 윤 764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