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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역사

[김세곤의 역사여행] 명성황후 역사여행 (11)

[김세곤의 역사여행] 명성황후 역사여행 (11)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1.04.13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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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왕후와 무당 진령군

김세곤 역사여행 칼럼니스트

19108월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순국한 선비 황현(1855∽1910)매천야록에는 무당 진령군 이야기가 나온다.

 

“18826월 임오군란 때 중전 민씨가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에 피난 가 있을 때 요사스러운 한 무당이 찾아와 뵙고 환궁할 날짜를 점쳐주었다. 그 날짜가 들어맞자 중전이 신기하게 여겨 무당을 데리고 81일에 환궁했다.

 

무당은 매양 중전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머리를 만지고, 배가 아프다면 배를 쓰다듬었는데 그럴 때마다 중전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이러자 중전은 잠시도 그녀와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무당이 궁궐에 상주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무당은 중전에게 자기는 본래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의 딸이니 신당을 지어주라.’고 요청했다.

 

18831021일에 고종과 민왕후는 무당을 위해 관왕(關王)을 모신 북묘(北廟)를 지어 주었다. 북묘는 창덕궁에서 가까운 산기슭 조용한 곳이었는데 송시열이 살았던 송동(宋洞 지금의 혜화동)이었다.

 

고종과 민왕후는 왕세자와 함께 북묘에 가서 제사를 올렸고, 창덕궁에서 산 너머 북묘까지 길도 새로 닦았다.

 

이윽고 고종은 그녀에게 진령군(眞靈君) 봉호를 제수했다. 조선에서 천민 중 천민인 무당에게 왕족에게나 붙는 군()의 칭호를 붙여 주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진령군은 아무 때나 대궐에 나아가 고종과 민왕후를 뵈었으며 때로는 남자 옷으로 단장하기도 하였다.

 

고종과 중전은 그녀를 가리키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이 되니 믿음직하도다.”

 

한편 임오군란 2년 뒤인 188410월에 김옥균, 박영교 · 박영효 형제, 홍영식 ·서광범 · 서재필 등 20~30대 젊은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수구파를 척살하고 근대적 자주국가를 만들고자,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변에 성공했다.

 

정변은 18841017일 밤 10시에 우정총국 낙성식(落成式) 연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1019일에 청군과 일본군은 창덕궁에서 전투를 하였고, 민왕후는 진령군이 있는 북묘로 피신했다. 이 날 밤에 고종도 중전을 뒤따라 북묘(北廟)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길로 선인문(宣仁門) 밖에 있는 청나라 오조유의 처소로 옮겼다. (고종실록 18841019)

결국 갑신정변은 청군이 승리하여 ‘3일 천하로 끝났다.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도망갔고, 홍영식 등은 처형되었다.

 

그런데 고종과 중전은 관운장이 자기들을 두 번이나 살렸다고 생각하여 진령군에 더욱 의지하였고 그녀에게 금은보화를 수시로 하사했다.

 

한편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동쪽 마당에는 '북묘 묘정비(北廟廟庭碑)'가 있다. 비는 1887년에 세웠는데 글은 고종이 지었고 글씨는 민영환이 썼다.

 

비문엔 나와 중전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났다. 임오년 병란(1882)에 관운장이 목숨을 구해주었다. 관운장을 위해 사당을 짓고 북묘라 이름했다. 갑신년(1884)에 역적들이 난을 일으켰다. 북묘로 가서 적을 피하니 흉도들 목을 베고 적을 물리쳤다.”고 적혀있다.

 

▲ 감곡 매괴성당 안내판

이후 진령군은 궁중에 출입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국정을 농단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길흉화복(吉凶禍福)이 걸려 있어 종종 수령과 변장들이 그녀의 손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대신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아부하니, 혹은 자매를 맺기도 했고 혹은 수양아들이 되길 원했다. 그중 윤영신, 조병식, 정태호, 이용직, 이유인이 특히 심했다. 이들은 무당의 도움으로 출세했다.

 

윤영신은 18693월에 일어난 광양민란 때 광양 현감이었는데, 승승장구하여 188412월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조병식은 1876년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878년에 탐학하다는 이유로 전라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는데, 1886년에 예조판서에 올랐다.

 

정태호는 1876년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 수뢰와 축재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는데 1880년에 풀려나서 1882년에 예방승지, 1884년 이조참판, 1886년에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용직(李容直)은 고종에게 돈을 바치고 1893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수탈의 달인이었다. 189412월에 총리대신이 이용직을 처벌하도록 아뢰었는데 수탈한 돈이 48만 냥이었다. (고종실록 18941227) 이는 당시 정부 세입 480만 냥의 10%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이유인은 진령군의 수양아들이 되어 줄곧 출세 가도를 달렸다. 두사람 사이엔 추한 소문도 들렸다.

 

아울러 그 무녀의 아들 김창열은 어엿하게 고위 관리처럼 행세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무당, 점쟁이들이 판을 쳤다.

 

▲ 감곡 매괴성당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 – 민왕후가 임오군란때 피신한 곳)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

▲ 1953년생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석사), 영국 워릭대 대학원 노사관계학과(석사) 졸업
▲ 1983년 행정고등고시(27) 합격
▲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 근무
▲ 2011년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고위공무원)으로 퇴직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역임
저서로는 <아우슈비츠 여행(2017)>, <부패에서 청렴으로(2016)>,<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장성 남문의병>,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 송흠>, <송강문학기행 - 전남 담양>,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국화처럼 향기롭게>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