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역사여행] 명성황후 역사여행 (1)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1.02.02 17:55
- 수정 2021.02.04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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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여행 칼럼니스트
김세곤 역사여행 칼럼니스트
뮤지컬 ‘명성황후’, 조수미의 노래 ‘나가거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성황후(1851∽1895)를 찾아 역사여행을 떠난다. 명성황후는 생존 시에는 중전 또는 민왕후, 심지어는 민비라 불렸다. 1895년에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왕후는 1897년 10월에 고종(1852∽1919)이 대한제국 황제가 되자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먼저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부터 간다. 이곳은 그녀가 1851년에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의 생가
민왕후는 여흥 민씨로 이름은 자영이다. 여흥 민씨는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와 숙종 계비인 인현왕후를 배출한 후 정승과 판서가 여러 사람 나온 노론 명문가였다. 아버지 민치록(1799∽1858)은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의 5대손으로서 과천현감,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첫 부인 오씨가 일찍 죽고 재취로 이씨를 맞아 1남 3녀를 낳았으나 막내딸 자영만 살아남았다.
민자영은 부친이 8세 때 돌아가시어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 안국동에 있는 감고당(感古堂 서울시 안국동, 지금의 덕성여고 자리)에서 살았다. 감고당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위하여 지어준 집으로 희빈 장씨의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5년(1689~1694) 동안 유폐되어 있던 곳이다.
그후 감고당은 여흥 민씨 종중에서 관리했는데 운현궁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딸 하나만 둔 민치록은 민치구의 둘째 아들 민승호가 양자로 들어왔다. 민승호(1830~1874)는 흥선대원군의 처남으로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이다. 촌수로는 12촌이었지만 민승호가 양자로 입적된 후 민자영은 자주 운현궁을 왕래하면서 부대부인 민씨의 귀여움을 받았는데 영리하고 재기발랄하여 인근의 칭찬이 높았다. 이때 한 살 아래인 고종이 민자영을 「안동방 아줌마」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원래 흥선군은 고종(어릴 때 이름이 명복)이 어린 시절에 김병문의 딸과 결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김병문은 안동김씨 일가이기는 하나 권력에서 소외되어 겉도는 처지였다. 그런데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은 약속을 파기하여 버렸다. 안동김씨 김병문이 다시 외척정치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걱정된 것이다.
이러자 부대부인 민씨가 친척인 민자영을 추천했다. 대원군은 어머니도 여흥민씨로, 어머니 · 아내 · 며느리 3대에 걸쳐 민씨와 인연이 있었다.
대원군이 생각해 보니 고아나 다름없는 민자영은 외척정치를 안 할 것으로 생각되어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대원군의 큰 오판이었다.
1866년 3월 21일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저택인 운현궁에서 친영례(親迎禮)를 하였다. 고종이 15세이고 중전이 16세였다. 민자영은 시아버지 대원군 덕분에 일약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민왕후는 3명의 대비와 왕실의 어른은 물론 대원군과 부대부인에게도 효성을 다하고 수 많은 궁녀들에게도 기품을 잃지 않았다. 궁중 사람들은 중전을 사랑하고 칭찬하였다.
윤효정은 그의 저서 ‘풍운 한말비사’에서 “왕비의 총명한 천성과 부덕으로 나라의 운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고종은 궁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고 1868년에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민왕후는 한숨만 쉬고 있었다.
이 때 그녀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독서에 심취하게 되는데 ‘사서삼경’, ‘춘추좌씨전’ 등의 고전과 ‘당송 팔대가’ 시문집 등을 부지런히 읽었고 ‘책략(策略)’을 공부했다.
1871년에 드디어 민왕후가 회임을 했다. 혼례를 치른 지 5년 만이었다.
11월에 왕후는 그토록 원하던 원자를 낳았다. 그런데 원자는 낳은 지 5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항문이 없는 아이였다.
민왕후는 대원군이 산삼을 달여 먹였는데 그것을 먹은 뒤 아이가 곧바로 죽어서 대원군이 죽였다고 의심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7권).
다른 책 (역사 저널 그날 8)에는 왕후가 회임 시에 대원군이 산삼을 보내어 아이가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이때부터 민왕후와 흥선대원군과의 관계가 틀어졌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
▲ 1953년생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석사), 영국 워릭대 대학원 노사관계학과(석사) 졸업
▲ 1983년 행정고등고시(27회) 합격
▲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 근무
▲ 2011년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고위공무원)으로 퇴직
▲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역임
▲ 저서로는 <아우슈비츠 여행(2017년)>, <부패에서 청렴으로(2016년)>,<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장성 남문의병>,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 송흠>, <송강문학기행 - 전남 담양>,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국화처럼 향기롭게>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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