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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코레야 1903년 가을 (1)-3

 코레야 1903년 가을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폴란드계 러시아인 세로체프스키(18581945)190310월 한 달 동안 대한제국을 여행한 기록 코레야 1903년 가을(1905년 간행 폴란드어판 제목은 한국, 극동의 열쇠’)책을 읽었다.

 

세로체프스키는 1902년에 러시아의 황실 지리학회 탐험대의 일원으로 아이누족 연구를 위해 일본 북부지역(홋카이도)로 떠났다. 이 탐험은 1903년까지 계속되었는데 탐원대원들은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시베리아와 중국 북동부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서 탐험 하였다.

 

탐험을 마친 세로체프스키는 일본을 떠나 19031010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1개월간 한국을 여행하고 중국과 실론, 이집트를 거쳐 폴란드로 돌아갔다.

 

코레야 1903년 가을은 모두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4장 한국의 종교, 19장 사회는 욕창 앓는 몸, 20장 간추린 한국사, 21장 전쟁 전야의 서울은 러일전쟁 전야의 대한제국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4장 한국의 종교중 미신에 빠진 궁궐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남녀무속인, 점성술사, 예언자, 풍수가, 주술사, 마법사들은 지금도 한국에 사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왕궁에 들어가 자기 수입의 원천이 되는 낡은 관습과 신앙을 열성적으로 옹호한다. 또 정치에 개입하여 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거나 적대적인 관료들과 대립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백성들의 소요를 일으킬 만한 불씨를 온나라에 퍼뜨리기도 하는데, 이는 모든 개선과 진보적인 개혁에 적대적인 것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9년 전에 살해당한 민비(18611895)는 모든 개혁을 열렬히 반대한 사람으로서, 그녀가 샤머니즘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스스로 주술사와 무당과 판수(최고 무속인)를 곁에 두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그들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1904년에 서울을 점령한 일본인들이 제일 먼저 해야 했던 것은 왕궁에서 이 사기꾼들을 모두 몰아내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선포된 황제의 칙령은 이 사기꾼들을 최근의 불행한 사태의 원천으로 지목하고 있다.(원주 러시아 통보119, 1904)

 

일본인들과 친일파 한국인들, 그리고 정부의 개혁파는 예로부터 무속인들에 대해 특별한 반감을 품어 왔다. 궁정 소속의 한 관리는, 한국의 황제가 올해에도 무속 제례를 위해 1만 한국달러()를 소비했노라며 내게 한탄한 적이 있다. 관리는 내게 그 돈을 차라리 학교에 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라고 물었는데, 내가 그 의견에 동의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 지음 · 김진영 외 4명 옮김, 코레야 1903년 가을, 개마고원, 2006, P 67)

 

민왕후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미신에 빠진 사실은 그녀의 종교가 무속 신앙인 점에서 잘 나타난다(kbs 역사저널 그날 팀, 역사저널 그날 8 순조에서 순종까지, 민음사, p 85)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다량의 아편을 먹고 순국한 조선의 마지막 선비 황현(18551910)은 쓴 야사(野史) 매천야록에서 민왕후가 궁중에서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자(나중에 순종)18742월에 탄생하면서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 없었다. 하루에 천금씩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 썼는데, 재정을 맡은 신하 가운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따지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십 년간 모은 것을 일 년도 안 되어 모두 탕진했다.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科擧)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50, 54 매천야록은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원본과 번역본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189856일의 윤치호 일기에는 고종의 미신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6(금요일) 화창한 날씨.

 

거의 하루종일 한세진의 집에서 지냈다. 한세진 씨는 전하(고종)의 어리석은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ʻ몇 년 전 무당들이 궁궐에서 득세할 때, 전하께서 무당 앞에 꿇어 엎드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무당들은 저세상의 영혼들과 영매(靈媒)로서 행세했는데, 어느 날 밤 무당이 전하 머리 위에 참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춤을 추다가 나는 태조 대왕이다! 네가 누구 때문에 위대해졌고, 왕실 재산을 갖게 되었느냐?‘고 소리쳤습니다.

 

전하께서는 마치 그 무당이 태조대왕이신 양 그 앞에서 허리를 굽혀 빌었고, 상궁에게 태조께서 원하시는 바를 알아내라고 명하셨습니다.

물론 무당은 태조의 영혼이 원한다면서 기도와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제물이란 그 무당에게 바치는 돈과 비단이었지요.’ ”

 

윤치호는 일기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전하께서 여전히 이런 어리석은 일에 빠져 계시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윤치호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에 영문일기가 번역되어 있다.)

 

 

 

 코레야 1903년 가을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폴란드 출신 세로셰프스키는 그의 책에서 ‘1895년 을미사변에 살해당한 민왕후가 샤머니즘의 열렬한 옹호자라고 소개하였다. 그런 증거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

 

매천 황현(18551910)매천야록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무당 진령군 이야기를 적었다.

 

“18826월 임오군란 때 민왕후가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에 피난 가 있을 때 요사스러운 한 무당이 찾아와 뵙고 환궁할 날짜를 점쳐주었다. 그 날짜가 들어맞자 중전이 신기하게 여겨 무당을 데리고 81일에 환궁했다.

 

무당은 매양 중전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머리를 만지고, 배가 아프다면 배를 쓰다듬었는데 그럴 때마다 중전의 병세가 호전되었다. 이러자 중전은 잠시도 그녀와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무당이 궁중에 상주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무당은 중전에게 자기는 본래 본디 관운장의 딸이니 신당을 지어주라.’고 요청했다.

 

고종은 무당 진령군을 위해 북묘(北廟)188310월에 지어 주었다. 이후 진령군은 아무 때나 대궐에 나아가 고종과 중전을 뵈었으며 때로는 남자 옷으로 단장하기도 하였다.

 

고종과 중전은 그를 가리키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이 되니 믿음직하도다.’ ”

조선에서 천민 중 천민인 무당에게 임금이 왕족에게나 붙는 군()의 칭호를 붙여 주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한편 188410월에 김옥균, 박영교 · 박영효 형제, 홍영식 ·서광범 · 서재필 등 20~30대 젊은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변에는 성공했지만, 청나라의 신속한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18841017일 밤 10시에 우정총국 낙성식(落成式) 연회에서 시작한 정변은 1019일에 청나라가 창덕궁을 공격하자 중전은 진령군이 있는 북묘(北廟)로 피신했다. 이날 밤에 고종도 중전을 뒤따라 북묘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실록 18841019)

 

이후 고종과 중전은 진령군이 자기들을 살렸다고 생각하였고, 진령군은 궁중에 출입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국정을 농단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수령과 방백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대신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아부하였다. 윤영신, 조병식, 이용직 등은 남매를 맺었고, 이들은 무당의 도움으로 출세했다. (황현 지음, 임형택 등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p 704-705 )

 

특히 이용직(李容直)은 고종에게 돈을 주고 1893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수탈의 달인이었다. 189412월에 총리대신이 그를 처벌하도록 아뢰었는데 수탈한 48만 냥이었다. (고종실록 18941227)

이는 당시 정부 세입 480만 냥의 10%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1893821일에 전() 정언 안효제가 상소를 올려 무당 진령군을 처벌하라고 아뢰었다. (고종실록 18938213번째 기사)

 

근래에 와서 북관왕묘(北關王廟)는 거짓과 야박한 것을 숭상하고, 굿을 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드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요사이 괴이한 귀신이 여우 같은 생각을 품고 관왕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 북관왕묘의 주인이 되어 요사스럽고 황당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함부로 ()’칭호를 부르며 감히 임금의 총애를

가로채고 있습니다.

 

또한 잇속을 늘이기 즐겨 하며 염치가 없는 사대부들을 널리 끌어들여서 아우요, 아들이요하면서 서로 칭찬하고 감춰 주며 권세를 부려 위엄을 보이거나 생색을 내니, 왕왕 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손에서 나옵니다.

 

(중략)

 

! 부당한 제사를 지내기 좋아하며 귀신을 모독하면서 복을 구하니 도리어 이런 죄를 짓는 것은 멸망하는 길입니다. 비록 일반 백성들 중에서 사리를 좀 아는 사람인 경우에도 이런 무리들에게 속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총명한 전하가 오히려 깨닫지 못하십니까?"

 

승지들은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그런데 상소 사본이 서울 장안에 널리 퍼졌고 고종과 중전도 읽어보았다. 특히 중전은 노하여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면서 이런 말을 한 자를 모두 죽어버려야 분이 풀리겠다.”고 말하였다.

 

이러자 고종이 위로하였다. “조정의 법이 일찍이 상소한 사람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소. 지금 죽이자면 죽일 수는 있겠지만 이러면 세자가 무엇을 본받겠소?”

 

이윽고 여러 신하들이 안효제를 처벌하라고 탄핵했다. 특히 고종의 사주를 받은 정언(正言) 김만제가 상소를 올려 안효제를 처벌하라고 아뢰었다. (고종실록 1893821)

 

“ ‘난망(亂亡)’이라는 두 글자는 신하로서는 입 밖에 낼 말이 아닌데 그렇게까지 말하였습니다. 국문하소서.”

 

다음날 고종은 안효제를 추자도로 귀양보냈다.

 

이어서 고종은 승정원에 지시했다.

오늘 이후로 나랏일에 대한 상소는 올리지 말라.”

(황현 지음·임형택 등 옮김, 역주 매천야록 (), p 325-326 )

 

이후 사대부들은 말조심하고 바둑이나 두고 술이나 마시면서 우스갯소리로 소일하였다. (박은식, 한국통사, 동서문화사, 1987, p 405)

 

 

 코레야 1903년 가을 (3)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폴란드 출신 세로셰프스키는 대한제국을 한 달간 여행한 책 코레야 1903년 가을에서 왕궁에 미신이 깊숙이 스며들었다.’고 적었다. 실제로 대한제국은 그랬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절명 직전의 민영익을 살려내 고종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1885229일에 설립된 서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 원장이 된 호레이스 알렌 (1858~1932)은 한말 외교사의 산 증인이다.

 

알렌은 18877월에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한국공사관에서 일했다. 1890년에 한국에 돌아온 알렌은 미국 공사관 서기관, 총영사, 대리 공사 등을 역임하고 18977월에 전권공사가 되어 줄곧 근무하다가 1905329일에 해임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알렌은 19041118일에 미 국무부에 아래와 같이 보고 했다.

 

고종은 병적으로 미신에 빠져 있으며, 1895년 갑오개혁 기간 중 궁중에서 쫓겨났던 무당들이 궁중의 모든 일에 영향력을 미치고 국고로 들어가야 할 세금까지 가로챘다. 고종은 전투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190411월에도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당들의 말들 듣고 안심했다는 것이다.”

 

(구대열, 디모클레스의 칼 ?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6, p 28)

 

고종의 미신사랑은 민왕후가 총애하는 무당을 진령군으로 봉한 일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민황후가 1895년에 시해된 지 10년이 다 되는데도 고종은 여전히 미신에 빠져 있었다.

 

두 사료가 알렌의 보고서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1904527일의 윤치호 일기이다. 이 사료는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527일 간밤에 비.

 

4.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황제는 궁궐을 짓느라 분주하다. (1904414일에 경운궁이 모두 불탔다- 필자 주)

 

무당과 점쟁이들이 있는 방 두 칸에서 시간을 보내는 황제, 난방을 한 곁방 밖으로 나와 한낮의 햇빛을 보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시간도 없는 황제, 권력이 일상이고 부패가 즐거움이고 음모가 인생인 황제. 이 황제는 이 저주받은 나라의 저주받은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몇백만 원의 돈을 궁궐을 짓는 데 낭비하고 있다.”

 

또 하나는 190492일에 의정부 참정 신기선이 올린 상소이다. 이는 190492일 자 고종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온몸과 터럭들까지 다 병들어 단 한 점의 살점도 성한 것이 없이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온갖 법이 문란해지고 모든 정사가 그르쳐졌습니다. 하나하나 두루 진찰해 보면 그 어떤 약도 효력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증세에 대한 처방을 가장 근원적인 데서 찾으면 두 가지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첫째,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것입니다. ... 위에서 정사를 깨끗이 하여야 아래서 명령을 미덥게 여기고 온 나라가 임금을 천신처럼 떠받들게 되어 백성들이 크나큰 교화를 입게 되고 나라가 태산의 반석처럼 안정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찮고 간사한 무리들이 폐하의 곁에서 가까이 지내는가 하면 점쟁이나 허튼 술법을 하는 무리들이 대궐 안에 가득합니다.

 

대신은 폐하를 뵈올 길이 없고 하찮은 관리만 늘 폐하를 뵙게 됩니다. 정사를 보는 자리는 체모나 엄할 뿐 서리나 하인들이 직접 폐하의 분부를 듣습니다. 시골의 무뢰배들이 대궐의 섬돌에 꼬리를 물고 드나들며 항간의 무당 할미 따위들이 대궐에 마구 들어갑니다.

 

평소에 감히 보통 관리도 가까이하지 못하던 자들이 폐하의 앞을 난잡하게 마구 질러다닙니다. 이로 인하여 벼슬을 함부로 주고 이를 통해 청탁이 공공연히 벌어집니다. 굿판이 대궐에서 함부로 벌어지고 장수하기를 빌러 명산(名山)으로 가는 무리들이 길을 덮었습니다.”

 

신기선은 대궐에 점쟁이와 무당이 마구 드나들고 굿판이 벌어지고 청탁이 공공연히 벌어지는 세태를 꼬집는다.

 

근원이 되는 곳이 이처럼 문란하기때문에 자질구레한 일들에까지 폐하께서 나서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게을러지고, 공적인 도리가 시행되지 못해서 모든 정사가 다 그르쳐져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되고 외국인의 충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래도 깨닫지 못합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선뜻 마음을 돌려 신속히 조상들의 옛 가법대로 소인(小人)들을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들을 가까이하며 경관(警官)들에게 엄히 신칙(申飭)하여 필요 없이 대궐에 들어가는 것을 단속하여서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만들어야 합니다. ”

 

 

그런데 고종의 비답(批答)이 걸작이다.

 

"정사의 요점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매우 극진하여 마음이 툭 트인다. 그러나 현재 시행하려면 역시 곤란한 점이 있으니 응당 잘 참작해서 돈독하게 도움을 줄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직하겠다는 말을 거두고 즉시 일을 보도록 하라.”

 

점쟁이와 무당을 궁궐에서 내쫓는 데 무슨 곤란한 점이 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