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내와 세계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56)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을 쓰다.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56)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을 쓰다.

승인 2020-08-31 09:51:55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69년 8월 초에 도스토예프스키 부부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독일 드레스덴으로 이사했다. 아이의 출산이 가까워지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탈리아어를 전혀 못 하는 것에 불안을 느껴 독일로 이사한 것이다. 9월14일에 둘째 딸 류보피가 무사히 태어났다. 그는 너무 기뻤다.

드레스덴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세 번째 대작 '악령'을 집필했다.'악령'의 구상은 1869년 11월에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네차예프 사건’에서 촉발되었다. 세르게이 네차예프 (1847∼1882)는 악명높은 니힐리스트였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니힐리스트란 모든 사상, 모든 권위, 모든 의미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급진주의자를 지칭했다.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네차예프는 '혁명가 문답'을 썼는데, 이 책은 한마디로 혁명 과업 달성을 위해서는 폭력·방화·테러·살인 등 어떤 수단과 방법도 모두 정당하다는 것이다.

1869년 3월에 네차예프는 제네바로 가서 무정부주의자 바쿠닌과 교류했다. 9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인민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소규모 비밀혁명단체를 만들고 '혁명가 문답'에 명시한 원칙을 바탕으로 조직원들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조직원 중 이바노프라는 페트롭스키 농업학교 학생회원이 그의 조직운영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탈퇴 의사를 밝혔다. 격노한 네차예프는 이바노프가 조직을 밀고할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조직원들을 선동했다.

이러자 11월21일에 조직원들은 이바노프를 학교 교정에서 구타하고 권총으로 살해한 후 교내 연못에 던져 버렸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네차예프의 악명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스위스로 도피했고 67명의 조직원들만 재판에 회부되었다.

네차예프 인물 사진. 사진=김세곤 제공



드레스덴에서 '네차예프 사건'을 신문에서 접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 소설을 한 권 쓰기로 작정했다. 그는 석 달 정도 걸려서 간단히 쓸 생각이었는데 구상을 하면서 소설의 스케일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는 전체 구상을 10번 이상 수정하였고 1870년 8월에는 그동안 쓴 글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는 1871년 1월부터 '러시아 통보'에 '악령'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7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 집필에 매진했다.

'악령'이라는 제목은 신약성서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악령(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에서 착안한 것인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에서 악령에 사로잡힌 민중들의 소요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러시아의 격동기를 묘사했다.

악령의 육필원고. 사진=김세곤 제공


러시아 지방의 작은 도시에 니힐리스트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의 정신적인 지도자는 지주의 아들 스타브로킨이고 실질적인 지도자는 그의 하수인을 자처한 표트르이다. 교활하고 기민한 표트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범죄를 기획하고 사주하며 실행하는 행동대장이다. 살인·방화·밀고·무고 등 온갖 범죄를 통해 그는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고 그룹을 장악한다.

표트르의 지휘 아래 니힐리스트들은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무조건 제거한다. 조직의 일원인 샤토프가 전향의 기미를 보이자 그 역시 살해된다. 그런데 살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표트르는 해외로 도피한다. (석영중 지음, 매핑 도스토옙스키, p 335-342)

도스토예프스키가 보기에 니힐리스트의 혁명운동은 추악한 사기꾼과 비열한 자들 그리고 배신자들의 폭동이다. 그리고 이 패거리는 표트르 의해 움직인다. 이런 러시아의 모습은 암울하기만 하다. 그리스도의 발 밑에 앉아 있는 치유된 러시아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편견과 악의에 가득 찬 소설 '악령'은 모든 젊은 세대가 그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작가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옳지 않은 견해를 철회하라는 커다란 압력을 받아야만 했다. (모출스끼 지음,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 p 155-156)

나중에 레닌도 도스토예프스키를 멸시했고, 그의 소설들은 한동안 러시아에서 금서가 되었다.

한편 단 한 사람의 절대 권력만 존재하는 '악령'은 테러리즘을 예고한다. 나치와 파시스트, 스탈린, 그리고 중국의 홍위병은 모두 악령에 나오는 표트르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1913∼1960)는 '악령'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가장 예언적인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카뮈는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을 바탕으로 희곡 '악령'을 썼는데 그가 죽기 1년 전인 1959년에 무대에 올렸다. 33명의 배우가 등장한 4시간의 공연은 대 성공이었다.

카뮈의 연극 '악령' 포스터. 사진=김세곤 제공


여담이지만 테러리스트 네차예프는 1872년에 러시아 정부의 요청을 받은 스위스 경찰에 체포되어 러시아로 인도되어 재판에서 20년 징역을 언도 받았다. 그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복역 중 1882년에 사망했으나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