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33) 푸시킨, 소설처럼 죽다
승인 2020-03-23 15: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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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1월27일 오후 4시경 푸시킨과 단테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변두리 쵸르나야 천(川) 근처의 눈이 많이 쌓인 숲속에서 결투를 벌였다. 단테스가 먼저 총을 뽑았다. 푸시킨은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이어서 푸시킨이 총을 쏘았으나 단테스는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푸시킨은 입회인에게 업혀 모이카 운하 거리 12번지에 있는 푸시킨 집(지금의 푸시킨 박물관)으로 들어왔다. 이때 아내 나탈리야와 식구들은 저녁 식사를 막 하려는 중이었다. 푸시킨은 서재로 옮겨졌고 주치의 아른트와 친구들이 곧바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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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이 총을 맞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시민들이 그의 집을 에워쌌다. 시민들은 푸시킨이 회복하길 기도했다. 하지만 워낙 치명상을 입은 푸시킨은 서재의 소파에서 총을 맞은 지 이틀 뒤인 1월29일에 의사와 친구 그리고 아내 나탈리야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목숨이 다했다. 숨쉬기 힘들어, 가슴이 답답해, 잘 있게 친구들”이었다.(예브게닌 오네긴/대위의 딸/스페이드의 여왕, 푸시킨/이동현 옮김, 동서문화사, 2012, p 41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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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집을 찾았다. 거리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니콜라이 정부는 그 수가 5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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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는 군중들의 소요를 우려했다. 푸시킨이 모략으로 죽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푸시킨의 유해는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한 밤중에 몰래 외증조부 한니발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에서 멀지 않은 스뱌토고르스키(‘성스런 언덕’이란 뜻) 수도원(지금의 프스코프 주 푸시킨스키예고르이)으로 운반되었다. 2월6일에 그는 어머니 무덤 옆에 묻혔다.
푸시킨의 어머니는 ‘표트르 대제가 총애하는 흑인’인 에디오피아의 공작의 아들 아브람 한니발의 손녀이다. 푸시킨은 증조부로부터 ‘아프리카적 성격’ ‘ 불꽃 같은 정열’ ‘곱슬머리 그리고 두툼한 입술을 물려 받았다. 그는 흑인이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모출스끼 지음, 이규환 이기주 옮김,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 씨네스트, 2009, p 17)
산문작가인 오도예프스키가 조사(弔詞)에서 ‘러시아 시의 태양은 졌다.’ 고 할 만큼 푸시킨의 죽음은 국민적인 비극이었다.
러시아 '철학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추체프는 푸시킨을 떠나보내는 마음을 단 두 구절의 시로 적었다.
“러시아는 너를
첫사랑처럼 잊지 못하리!”
푸시킨, 그는 정녕 러시아 최고의 국민시인이었다.
한편 시인 레르몬또프(1814∼1841)는 위대한 시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노래하며 푸시킨의 사망을 음모로 결론지었다. 23세의 청년 시인은 음모자로 지목된 차르 정부에 대한 분노와 항의 그리고 신랄한 비판을 담은 '시인의 죽음에 부쳐'라는 시를 쓴다.
그러나 너희들, 다 알고 있는 비겁한 행위로
명성있는 조상의 오만한 자손들이여.
운명의 장난으로 모욕당한 일족을
비열한 발뒤꿈치로 짓밟아버린 부스레기들아!
너희들, 왕좌 옆에 탐욕스레 무리지어 서서
자유, 천재, 영광을 죽이는 사형 집행인들아!
레르몬또프는 공정하고 무서운 신의 심판을 호소한 후 시를 끝맺는다.
너희의 검은 피로는 시인의 경건한 피를
씻어낼 수 없으리라!
이 시는 필사본으로 퍼져 널리 알려졌고, 결국 니콜라이 1세의 귀에 들어가, 레르몬또프는 까프까즈로 전출되어 유형생활을 하게 된다. (모출스끼 지음,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 p77-78)
한편 수도원은 1924년에 폐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푸시킨 묘는 잘 보존되었다. 이를 두고 러시아인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서정 지음,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모요사, 2016, p 11-36)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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