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白碑)로 기리는 청백리 박수량
¶글쓴이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그의 청백함 알면서 비에다 새삼스럽게 실상 새기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누(累)가 될지도”
-명종 “경의 집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때가 한 달 중 거의 절반이나 된다는데” 어찰 보내
-“내가 죽은 후 삼가하여 시호(諡號) 주청도 말고 묘앞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 아들에게 유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는 청백리를 두 번이나 한 박수량(朴守良 1491∽1554) 묘소가 있다. 묘 앞에는 이름도, 글자 한 자 없는 백비(白碑)가 있다.
“그의 청백함을 알면서 비에다 새삼스럽게 그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백에 누(累)가 될지도 모른다.”
조선 13대 임금 명종(1534∼1567 재위 1545∼1567)은 청렴결백한 박수량의 삶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백비를 하사했다.
박수량은 청렴했다. 명종실록에는 박수량이 죽었을 때 가족이 상여를 메고 갈 돈이 없어 고향에도 가지 못하자, 대사헌 윤춘년이 명종에게 청하여 정부지원금으로 장사를 겨우 치렀다고 실려 있다(명종실록 1554년 1월 19일).
이렇게 청렴한 박수량이었으나 그도 한 번은 의심을 받았다. 야사(野史)에는 박수량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박수량이 국유재산을 사유재물로 삼는다고 모략하였다. 이에 명종은 비밀리에 암행어사에게 진상조사를 시켰다. 어명을 받은 암행어사는 과객으로 가장하여 박수량의 장성 본가를 살폈다. 박수량의 집은 청빈 일색이었다. 암행어사는 이를 사실대로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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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는 청백리를 두 번이나 한 박수량 묘소가 있고, 묘 앞에는 글자 한 자 없는 백비(白碑)가 있다.
그러나 명종은 다시 다른 어사를 보내어 재조사를 시켰다. 두 번째 암행어사 역시 박수량의 청빈함을 보고하였다. 그때야 비로소 명종은 박수량을 신임하고 중책을 맡겼다 한다.
명종의 박수량에 대한 신임은 각별하였다. 명종은 왕궁 직영 농장에서 재배한 쌀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사실은 명종이 그에게 보낸 어찰에 기록되어 있다.
“경을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도다. 건강은 어떠한지 궁금하오. 듣건대 경의 집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때가 한 달 중에 거반(居半거의 절반)이나 된다는데,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오. 나의 동원에 벼가 막 익었음에, 몇 말을 타작하여 보내노라. 비록 물량은 적으나 마음을 씀은 크니 경은 어찌 여길는지?”
한편 박수량은 권력 실세에 대한 부패 척결에 앞장 선 검찰관이었다.
그는 1530년(중종 25년) 사간원 사간(종3품) 시절에 인사 청탁에 연루된 좌찬성 이항을 파직시켰다. 이후 이항은 함경도로 유배 가서 사약을 받았다.
1552년에 박수량은 전라도 관찰사를 하였는데 이 때 그는 영의정 이기의 오른팔인 광주목사 임구령을 파직시켰다. 명종은 영의정 이기가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이기가 거느린 양인(良人)이 전국에 몇 명이나 되는 지를 팔도의 관찰사에게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어명에도 불구하고 7도의 관찰사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은 최고 권력자 이기의 보복이 두려워서 감히 조사를 못 하고 있었는데, 유독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만은 조사를 방해한 광주목사 임구령을 파직시키라고 임금에게 보고하여 임구령이 구속되었다. 임구령은 무오사화의 주역 임백령의 동생인데 윤원형(문정왕후의 동생)과도 친했다.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댄 박수량.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명종 임금.
조선왕조 시대는 이렇게 부패 척결에 엄정했다. 이 사건을 실록에 적은 사관(史官)은 권력에 추종하지 않은 박수량을 명신(名臣)이라고 극찬했다(명종실록 1552년 2월29일).
아울러 박수량은 애민하는 목민관이었다.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근무한 지 두 달 되었을 가을에, 날씨가 너무나 불순하여 백성들이 병에 걸리고 임산부들이 죽을 위험에 있음을 직시하고 조정에 약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인가.
이렇게 평생 분수를 지킨 박수량은 그는 평소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초야에서 태어나 임금의 후한 은총으로 판서 벼슬에까지 올랐으니 그 영화는 과분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 행동을 삼가하여 시호(諡號)도 주청하지 말고 묘 앞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
이를 본받아 박수량은 별세한 지 250년 후인 1805년에야 시호를 받았다. 시호는 정혜공(貞惠公)인데, 정혜는 청백수절(淸白守節)의 정(貞)과 애민호여(愛民好與)의 혜(惠)를 의미한다. 후손들은 묘비를 1888년에 세웠는데, 묘비명은 문묘에 배향된 호남의 유일한 선비이고 장성 출신인 하서 김인후(1510∽1560)로부터 미리 받아놓았다.
묘지명은 다음과 같다.
“금빛처럼 아름답고 옥처럼 단아한 자태
안으로는 학문을 쌓고 밖으로는 행동을 자제했네.
몸가짐을 검약하고 낮춰 남을 받드니 사귐에 해로움이 없었네.
(후략)”
요즘 공직사회는 부패와 탐욕, 권력 남용과 자기편 감싸기가 넘치고 있다. 이에 ‘백비(白碑)’의 주인공 박수량의 삶을 되새겨 본다. 공직자의 참다운 명예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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